신탁법 요건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더라도 유언대용신탁을 한 망인의 재산을 생전 뜻대로 처분하라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상고심에서 피고 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세종이 유언대용신탁의 제정 취지와 망인의 생전 의지를 면밀히 들여다본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지난달 16일 아들 A씨에게만 부동산 재산을 상속했다며 망인의 자녀들이 유류분을 주장한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피상속인이 살아 있을 때 자익신탁(위탁자와 수익자가 같은 신탁)을 한 부분이 망인 의사에 명백히 반하지 않는 한 유언대용신탁 계약 자체를 무효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는 신탁법 36조(수탁자는 누구의 명의로도 신탁의 이익을 누리지 못한다) 위반을 이유로 유언대용신탁 전체를 무효로 본 1·2심과 대조된다.

2020년 12월 사망한 망인은 자식 6명 가운데 자신을 보필한 A씨에게 수억원대 부동산을 유언대용신탁으로 물려줬다. 이에 반발한 나머지 상속인 3명은 A씨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재판부는 망인의 부동산 지분을 상속인 6명에게 각각 일괄 배분하라고 했다. 재판부는 “신탁을 관리하는 사람인 수탁자가 단독으로 사후 수익자가 되도록 하는 것은 신탁법 36조에 반해 허용될 수 없다”며 “법률행위의 일부가 무효일 때는 전부를 무효로 한다는 민법 137조에 따라 유언대용신탁도 전부 무효”라고 판단했다.

석근배, 허현, 김정환 세종 변호사는 유언대용신탁이 위탁자의 사후 재산 처분 의사를 반영하고 엄격한 유언 방식 제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도라고 강조했다. 또 A씨가 30년 넘게 아버지를 부양하고 부도난 회사를 일으켜 세운 공로를 재판부에 전달하며 망인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 변호사는 “유언대용신탁 제도는 엄격한 유언 방식을 따르지 않고도 사망한 뒤 자기 재산을 뜻대로 처분하고 활용하기를 바라는 위탁자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며 “제도 취지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파기 환송 판결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