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호의 저작권 세상] 현대 사회에서 연구자의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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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다움' 지키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열정과 소신 갖춘 연구자 양성 체계 마련해야
이일호 연세대 법학연구원 연구교수
열정과 소신 갖춘 연구자 양성 체계 마련해야
이일호 연세대 법학연구원 연구교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놀랍게도 판결문에서 나온 말들이다. 대법원은 중요 사안을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는데, 판결문에는 판결의 이유가 되는 다수의견 외에 소수의견 역시 실린다. 소수의견은 다수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대법관이 내놓는 개인 의견으로, 위와 같이 강한 어조로 다수의견을 꼬집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대법관의 소신과 신념은 소중하게 여겨진다.
대법원에서는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재판연구관들은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을 검토하고, 대법관을 위해 법 논리를 정리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에는 여러 갈래의 선고 결과를 위한 논거들이 제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보고서를 작성하는 재판연구관은 자신의 소신에 반하는 의견 내기를 소신껏 거절할 수 없고, ‘이런 의견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평해서도 안 될 것이다. 재판‘연구’관의 역할은 법과 문헌을 연구해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연구관이 나름대로 대법관이 되기 위한 등용문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대법관이 됐을 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의견을 위해 골몰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연구자에게 거는 기대는 미묘하다. 연구자는 소신을 위해 당장 손해를 감수하는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하지만 재판연구관처럼 주장에 필요한 논리를 만들어 설득하는 능력이 있어야 높은 평가를 받는 게 현실이다.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다가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를 옮겨 논란이 생길 때마다 해당 플랫폼을 위해 논리를 만들어내는 학자들이 있다.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본인의 소신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을 즐기는 학자도 있다. 필요에 따라 이들은 권위자가 되기도 하지만 ‘학자다움’을 두고 강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연구자는 이 두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회문제는 점차 복잡해지지만, 분과학(分科學)과 전문화 때문에 한 사람의 연구자가 내놓을 수 있는 주장과 논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른 연구자의 의견을 경청하고 기꺼이 함께 논의해야 한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는 위대한 학자를 상상할 수 없듯 연구자는 사회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치에 대해 소신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이런 연구자다움은 최근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돈 되는 학문에의 쏠림 현상도 이 중 하나일 것이다. 공급에 따라 수요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나 경제력에 비해 연구자 양성 체계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고, 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도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에서 연구 수요가 크지 않다고 볼 수는 없는데도, 연구가 필요할 때 그때그때 다급하게 연구자를 찾는 것은 공공부문이든 사기업이든 일상이 돼버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연구자에게도 생계가 중요하고, 언제까지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기다리지는 못한다. 최근 법학에서 연구자 이탈은 특히 심하다. 저작권 법학에서 학문 후속세대가 유입되지 않는 문제는 ‘심각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준을 넘어섰다. 대법관의 소신과 신념은 그들의 독립성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연구자가 열정과 소신을 지켜가길 소망한다.
놀랍게도 판결문에서 나온 말들이다. 대법원은 중요 사안을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는데, 판결문에는 판결의 이유가 되는 다수의견 외에 소수의견 역시 실린다. 소수의견은 다수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대법관이 내놓는 개인 의견으로, 위와 같이 강한 어조로 다수의견을 꼬집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대법관의 소신과 신념은 소중하게 여겨진다.
대법원에서는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재판연구관들은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을 검토하고, 대법관을 위해 법 논리를 정리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에는 여러 갈래의 선고 결과를 위한 논거들이 제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보고서를 작성하는 재판연구관은 자신의 소신에 반하는 의견 내기를 소신껏 거절할 수 없고, ‘이런 의견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평해서도 안 될 것이다. 재판‘연구’관의 역할은 법과 문헌을 연구해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연구관이 나름대로 대법관이 되기 위한 등용문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대법관이 됐을 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의견을 위해 골몰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연구자에게 거는 기대는 미묘하다. 연구자는 소신을 위해 당장 손해를 감수하는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하지만 재판연구관처럼 주장에 필요한 논리를 만들어 설득하는 능력이 있어야 높은 평가를 받는 게 현실이다.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다가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를 옮겨 논란이 생길 때마다 해당 플랫폼을 위해 논리를 만들어내는 학자들이 있다.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본인의 소신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을 즐기는 학자도 있다. 필요에 따라 이들은 권위자가 되기도 하지만 ‘학자다움’을 두고 강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연구자는 이 두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회문제는 점차 복잡해지지만, 분과학(分科學)과 전문화 때문에 한 사람의 연구자가 내놓을 수 있는 주장과 논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른 연구자의 의견을 경청하고 기꺼이 함께 논의해야 한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는 위대한 학자를 상상할 수 없듯 연구자는 사회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치에 대해 소신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이런 연구자다움은 최근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돈 되는 학문에의 쏠림 현상도 이 중 하나일 것이다. 공급에 따라 수요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나 경제력에 비해 연구자 양성 체계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고, 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도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에서 연구 수요가 크지 않다고 볼 수는 없는데도, 연구가 필요할 때 그때그때 다급하게 연구자를 찾는 것은 공공부문이든 사기업이든 일상이 돼버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연구자에게도 생계가 중요하고, 언제까지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기다리지는 못한다. 최근 법학에서 연구자 이탈은 특히 심하다. 저작권 법학에서 학문 후속세대가 유입되지 않는 문제는 ‘심각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준을 넘어섰다. 대법관의 소신과 신념은 그들의 독립성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연구자가 열정과 소신을 지켜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