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the in the Desired Air on the Calm Tide(2024). 카세트 테이프 케이스를 쌓아 만들었다. /페로탕 제공
Breathe in the Desired Air on the Calm Tide(2024). 카세트 테이프 케이스를 쌓아 만들었다. /페로탕 제공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미술 작품으로도 즐기고 싶다.’ 회화를 공부하던 독일 작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50)는 20대 중반이던 1990년대 말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카세트테이프를 자르고 변형하고 쌓아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카세트테이프는 음악을 저장하는 가장 대중적이고 저렴한 매체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모은 ‘믹스테이프’를 만들어 서로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카세트테이프는 그 자체로 추억과 애정을 담는 수단이기도 했다.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의 재료는 LP판과 VHS 비디오테이프 등으로 확장됐다.

세월이 흘렀다.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카세트테이프는 2000년대 초반 CD와 MP3 파일에 자리를 내주며 급격히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불과 2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는 그 존재조차 잊힐 지경이 됐다. 그러면서 힐데브란트의 작업에도 ‘향수’와 ‘복고’라는 의미가 덧씌워졌다. 세련된 색채와 조형에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의미까지 더해지니, 샤넬과 루이비통 등 세계적인 명품 업체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추억의 카세트테이프, 힐데브란트의 예술로 부활하다
서울 샤넬 플래그십 스토어에 설치된 대형 작품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힐데브란트의 개인전이 지금 청담동 페로탕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카세트테이프를 비롯해 ‘추억의 매체’들을 다양하게 활용한 작품들이 나와 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향수’. 힐데브란트는 “카세트테이프나 LP 등 과거의 물건들을 재료로 사용하다 보니 작품 주제도 추억에 관한 쪽으로 쏠리게 됐다”며 “기둥 작품의 색상 조합은 고향의 분수대 색깔,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입었던 옷 색깔 등 내 기억에서 따왔다”고 말했다. “재료를 어떻게 구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버려지는 것들을 가져오거나 이베이 등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입한다”고 답했다.
Donna(2024). /페로탕 제공
Donna(2024). /페로탕 제공
미술사와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 많기에, 아는 만큼 더욱 깊이 즐길 수 있는 전시다. 카세트테이프의 라벨을 활용해 영화 ‘블랙 스완’에 나온 나탈리 포트먼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 루마니아의 추상조각 거장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서 영향을 받아 LP판을 변형시켜 만든 색색의 기둥 작품이 눈길을 끈다. 흑조와 백조를 대비시킨 카세트테이프 작업은 스웨덴 작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백조’(1915)에서 영감을 받았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