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스'로 데뷔한 김강선 "'소노의 주장'으로 기억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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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캐롯으로 이어진 고난 서사 딛고 이제 소노 코치로
21일 은퇴한 고양 소노의 주장 김강선(37)이 프로농구에 데뷔한 건 15년 전이다.
그때는 '대구 오리온스'가 있었다.
원년인 1997년부터 대구 동양 오리온스라는 이름으로 프로농구에 참여한 이 팀은 2011년 갑자기 정든 연고지를 떠나더니 경기도 고양시에 새로 정착했다.
고양 오리온스는 2015-2016시즌에는 이름을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로 바꿨다.
그렇게 다시 '고양 오리온'으로 불리던 팀은 몇 년 만에 또 한 번 농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22년 돌연 구단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데이원자산운용이 이를 인수하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오리온 농구단'은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구단의 네이밍 스폰서 캐롯손해보험의 이름을 따 이제 고양 캐롯으로 새롭게 출발한 이 팀은 또 격변의 시기를 거쳐 '고양 데이원'이 돼버렸다.
KBL 가입비 격인 특별회비를 지연 납부하고, 선수·직원 월급 지급을 몇 달씩 미루는 등 재정난에 따른 경기 외적 논란을 야기한 끝에 캐롯손해보험이 후원 계약을 중단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데이원의 역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해 6월 KBL 이사회는 임금 체불, 오리온 인수 대금 미납 등 각종 재정 문제를 일으킨 이 팀을 제명했다.
오갈 데 없는 선수단을 구제한 게 바로 대명소노그룹의 지주사인 소노인터내셔널이었다.
고양 소노가 창단되면서 고양을 연고로 한 팀의 명맥이 이어졌고, KBL도 10개 구단 체제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 격동기를 모두 체험한 선수가 바로 김강선이다.
오리온 농구단에서만 뛰었던 그는 팀이 데이원으로 넘어가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소노의 등장으로 한 순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뛰는 기분을 느꼈다.
15년간 이어진 선수 생활을 막 마무리한 김강선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소노 이전의 시기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정든 '옛 팀' 오리온과 고난으로 다가왔던 캐롯 시절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했다.
김강선은 "대구에서 경기를 뛰기 시작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고양에 와서도 팬들께서 성원을 많이 주셨다"며 "캐롯 시절 힘든 상황에서도 4강 플레이오프(PO)에 올라 팬들께서 더 좋아하셨다"고 돌아봤다.
이어 "힘든 게 워낙 많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웃었다.
김강선은 소노가 자신의 '시작과 끝'이라고 표현하며 "새로운 팀에서 새롭게 시작해, 또 여기서 끝을 맺었다"고 말했다.
프로농구 역사에 남을 고난 서사 속 인물보다는 '소노의 주장'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신생팀의 주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한 그는 이제 소노에서 코치로 새롭게 출발한다.
프로농구 명장으로 꼽히는 김승기 감독 밑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법을 배운다.
김강선은 자신과 김 감독의 농구관이 잘 어울린다고 본다.
그는 "난 농구할 때 눈치 안 보는 성격이라 막 던졌다.
안 던져도 욕먹고, 던져서 못 넣어서 욕먹는 게 똑같다면 던진다"고 말했다.
신인 때부터 3점 성공률 40.7%를 기록한 김강선은 통산 3점 성공률(33.9%)이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수비가 조금만 떨어지면 과감하게 외곽포를 쐈다.
프로농구 10개 팀 사령탑 중 외곽슛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김 감독 체제에서 뛴 2시즌 동안은 경기당 3.5개씩 3점을 시도했다.
김강선은 "그게 요즘 시대에 맞는 농구다.
물론 그런 외곽 농구도 강력한 수비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며 "수비가 확실히 돼야 더 많이 슛을 던질 수 있다.
감독님도 그걸 원하신다"고 말했다.
정규리그 통산 576경기를 뛴 김강선은 공격에서는 3점슛, 수비에서는 상대 에이스를 막은 역할을 받았다.
슈터와 수비수 가운데 어떤 종류의 선수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김강선은 후자가 좋다고 했다.
그는 "수비 잘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은퇴하기 전 수비상을 한 번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수비는 정신만 차리면 된다.
슛에는 기복이 있지만 수비에는 없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그때는 '대구 오리온스'가 있었다.
원년인 1997년부터 대구 동양 오리온스라는 이름으로 프로농구에 참여한 이 팀은 2011년 갑자기 정든 연고지를 떠나더니 경기도 고양시에 새로 정착했다.
고양 오리온스는 2015-2016시즌에는 이름을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로 바꿨다.
그렇게 다시 '고양 오리온'으로 불리던 팀은 몇 년 만에 또 한 번 농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22년 돌연 구단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데이원자산운용이 이를 인수하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오리온 농구단'은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구단의 네이밍 스폰서 캐롯손해보험의 이름을 따 이제 고양 캐롯으로 새롭게 출발한 이 팀은 또 격변의 시기를 거쳐 '고양 데이원'이 돼버렸다.
KBL 가입비 격인 특별회비를 지연 납부하고, 선수·직원 월급 지급을 몇 달씩 미루는 등 재정난에 따른 경기 외적 논란을 야기한 끝에 캐롯손해보험이 후원 계약을 중단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데이원의 역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해 6월 KBL 이사회는 임금 체불, 오리온 인수 대금 미납 등 각종 재정 문제를 일으킨 이 팀을 제명했다.
오갈 데 없는 선수단을 구제한 게 바로 대명소노그룹의 지주사인 소노인터내셔널이었다.
고양 소노가 창단되면서 고양을 연고로 한 팀의 명맥이 이어졌고, KBL도 10개 구단 체제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 격동기를 모두 체험한 선수가 바로 김강선이다.
오리온 농구단에서만 뛰었던 그는 팀이 데이원으로 넘어가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소노의 등장으로 한 순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뛰는 기분을 느꼈다.
15년간 이어진 선수 생활을 막 마무리한 김강선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소노 이전의 시기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정든 '옛 팀' 오리온과 고난으로 다가왔던 캐롯 시절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했다.
김강선은 "대구에서 경기를 뛰기 시작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고양에 와서도 팬들께서 성원을 많이 주셨다"며 "캐롯 시절 힘든 상황에서도 4강 플레이오프(PO)에 올라 팬들께서 더 좋아하셨다"고 돌아봤다.
이어 "힘든 게 워낙 많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웃었다.
김강선은 소노가 자신의 '시작과 끝'이라고 표현하며 "새로운 팀에서 새롭게 시작해, 또 여기서 끝을 맺었다"고 말했다.
프로농구 역사에 남을 고난 서사 속 인물보다는 '소노의 주장'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신생팀의 주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한 그는 이제 소노에서 코치로 새롭게 출발한다.
프로농구 명장으로 꼽히는 김승기 감독 밑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법을 배운다.
김강선은 자신과 김 감독의 농구관이 잘 어울린다고 본다.
그는 "난 농구할 때 눈치 안 보는 성격이라 막 던졌다.
안 던져도 욕먹고, 던져서 못 넣어서 욕먹는 게 똑같다면 던진다"고 말했다.
신인 때부터 3점 성공률 40.7%를 기록한 김강선은 통산 3점 성공률(33.9%)이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수비가 조금만 떨어지면 과감하게 외곽포를 쐈다.
프로농구 10개 팀 사령탑 중 외곽슛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김 감독 체제에서 뛴 2시즌 동안은 경기당 3.5개씩 3점을 시도했다.
김강선은 "그게 요즘 시대에 맞는 농구다.
물론 그런 외곽 농구도 강력한 수비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며 "수비가 확실히 돼야 더 많이 슛을 던질 수 있다.
감독님도 그걸 원하신다"고 말했다.
정규리그 통산 576경기를 뛴 김강선은 공격에서는 3점슛, 수비에서는 상대 에이스를 막은 역할을 받았다.
슈터와 수비수 가운데 어떤 종류의 선수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김강선은 후자가 좋다고 했다.
그는 "수비 잘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은퇴하기 전 수비상을 한 번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수비는 정신만 차리면 된다.
슛에는 기복이 있지만 수비에는 없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