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시장에 솥단지 건 지 71년…전국구 넘어 세계로 간 '어묵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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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승계기업을 가다
(1) 삼진식품
(1) 삼진식품
원조 프리미엄 - Originator
3대 경영 밑천은 '원조' 지키기…1953년 시작 부산 어묵의 시초
‘막내 오뎅.’반 친구들은 박종수 삼진식품 회장(71)을 이렇게 부르며 놀렸다. 집이자 어묵 공장에서 일손을 거들던 시절, 몸에선 늘 어묵 냄새가 났다. 그때마다 교실로 달려와 녀석들을 혼내준 건 ‘큰 오뎅’ ‘중간 오뎅’ 형들이었다.
박 회장이 태어난 1953년, 삼진식품도 그해 처음 솥단지를 내걸었다. 부친인 박재덕 창업주가 부산 봉래시장 판자촌에서 어묵을 반죽해 튀기면서다. 어묵은 6·25전쟁 이후 서민들의 저렴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1970년대 경제성장기엔 포장마차의 단골 안주로 인기를 끌었다. 71년째를 맞은 삼진식품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어묵 제조업체이자 ‘부산 어묵의 원조’로 꼽힌다. 봉래시장의 어묵 공장 터에 새로 지은 삼진식품가공소는 원동기를 이용한 어묵회사 최초의 현대적 어묵 생산공장이었다. 지금은 어묵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원조 기업이라는 정체성은 삼진식품이 3대 경영을 이어온 주요 원동력으로 꼽힌다.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에 다니던 박 회장이 삼진식품 경영에 나선 건 1986년부터다. 당시 삼진식품은 위기 상황이었다. 외부 여건부터 좋지 않았다. 어묵 제조 공정의 위생 상태와 영양성분 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된 데다 어묵 제조업체 간 가격 경쟁이 심했다. 삼진식품 내부 사정도 어려웠다. 부산을 벗어나 대구 울산 등으로 유통망을 확장했으나 거래처 수금이 원활하지 않아 부채가 늘기 시작했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 회장은 우선 수금 문제로 말썽을 빚던 거래처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금치 등을 재료로 활용하거나 채소의 즙을 이용해 어묵에 색깔을 내는 등 수십 년간 변화가 없던 어묵 제품의 혁신에도 나섰다. 박 회장은 “부친이 경영할 때도 물건은 부산에서 가장 맛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전통을 이어 나가려면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등한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이 경영을 맡은 지 10여 년이 지나면서 삼진식품은 부산 일대에서 다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경영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자 박 회장은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2000년에 영도1공장을 신축한 데 이어 2011년에 장림공장을 설립했다. 이 기간 생산량은 최대 60t으로 약 10배 증가했다. 3대 경영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닦은 셈이다.
25년간 쉴 새 없이 달려온 박 회장의 몸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협심증으로 스텐트 시술만 세 번을 받았다. 회사 경영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미국 유학 중이던 장남을 불러들였다.
Pivoting - 판을 바꾼 경영혁신
뉴요커 꿈 접은 아들의 '맛케팅'…25년 전 아버지처럼 발상의 전환
박용준 대표(41)의 별명도 ‘오뎅’이었다. 이 말을 듣기 싫었던 그가 꿈꾼 삶은 화이트칼라 회사원이었다. 2006년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것도 그래서였다. 뉴욕주립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그에게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011년 귀국해 둘러본 삼진식품은 한눈에도 경영 공백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들(어묵 장인들)은 “아버지가 이젠 힘들어서 안 된다. 네가 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도 천생 ‘어묵집 아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무게는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묵을 접어 포장지에 넣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 회장이 기업을 물려받자마자 팔을 걷어붙이던 25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 달쯤 뒤엔 영업 전선에도 뛰어들었다. 하루에 100~200상자 사가는 기존 거래처만으로는 기업을 성장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박 대표는 식자재를 구매할 만한 업소를 찾아 나섰다.
처음 보는 도매상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박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빵집은 사람들이 매장에 찾아오는데, 우리는 왜 대리점이나 중개상만 찾아다녀야 하나.’ 그가 내린 결론은 소비자에게 직접 브랜드를 알려야겠다는 것이었다. 수십 년간 굳어진 기업 간 거래(B2B) 방식이 아니라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기업으로 탈바꿈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구상을 들은 박 회장은 “제조쟁이가 할 일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박 대표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어묵 1번가’라는 매장을 내고 홈페이지를 개설하며 소비자 접점을 늘리려는 시도를 거듭했다.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2013년 봉래공장을 개조해 제과점 형태의 어묵베이커리 매장을 오픈했다. 어묵고로케 등 매대를 채울 다양한 제품도 개발했다. 삼진식품의 어묵베이커리는 현재 전국에 15개 매장을 두고 있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도 진출했다. 어묵베이커리를 선보인 후 10년간 매출이 10배 증가했다.
경쟁사도 앞다퉈 어묵베이커리에 뛰어들었다. 어묵베이커리 시장 규모는 1000억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혁신적인 B2C 전략을 도입해 비즈니스 영역을 창출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박 대표는 “돌이켜보면 스타트업이 아니라 부친에게 물려받은 기업이라는 발판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공이 가능했다”며 “마케팅 혁신이 큰 역할을 했지만 품질을 유지하는 제조업의 본질을 고집한 부친의 기본기가 바탕이 됐다는 걸 새삼 느낀다”고 강조했다.
Quality - 맛에 대한 고집
어육비율 최소 80%는 지켜라…한번이라도 품질 양보하면 끝장
“남는 게 없더라도 좋은 재료를 써야 한데이. 다 사람 묵는 거 아이가.”부산 봉래동 어묵역사관 입구에는 박재덕 창업주의 사진과 함께 삼진식품의 경영철학이기도 한 이 문구가 적혀 있다. 어묵은 생선살과 밀가루를 배합해 만든다. 어육 비율이 증가할수록 어묵의 탄력이 높아지고 식감이 좋아진다.
삼진식품은 어육값이 상승하더라도 늘 생선을 80~90% 안팎 사용한다. 박종수 회장은 “가격이 훨씬 싼 밀가루를 많이 넣을수록 이익이 나지만 창업주 때부터 내려온 품질에 대한 원칙은 양보할 수 없는 경영철학”이라며 “덜 남으면 많이 팔면 되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대기업에 어묵을 납품하지 않았던 것도 박 회장의 고집이다. 주문자상표위탁생산(OEM)을 하려면 생산단가를 낮춰야 해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박 회장과 더불어 삼진식품의 실질적인 맛을 좌우한 인물로는 이금복 어묵 장인이 꼽힌다. 박 회장의 부인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삼진식품 최고의 어묵 장인이다. 어묵베이커리의 히트 상품인 어묵고로케도 그가 개발했다. 평생 삼진식품에서 근무했지만 별다른 직책이나 월급을 받은 적도 없다. 이금복 어묵 장인은 유튜버로도 활동 중이다. ‘어묵 장인 이금복’이라는 채널명으로 오래된 맛집을 찾아다닌다.
Relationship - 수평적 조직문화
함께가 아니면 의미 없다…입사경쟁률 160 대 1 되기도
삼진식품이 처음 어묵을 만든 봉래시장 판잣집. 식사 시간이 되면 사장과 직원이 모두 모여 큰 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종업원이라기보다는 ‘한 식구’ 같은 삼진식품의 조직문화는 그때부터였다.가내 수공업 형태로 시작한 삼진식품이 공장을 넓히고 기계를 들여와 자동화로 나아갈 때도 오랫동안 일한 어묵 기술자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지금도 삼진어묵에는 40여 년 일한 기술자가 많다. 박종수 회장에겐 친구, 박용준 대표에겐 아저씨인 그들이다.
삼진식품이 어묵베이커리 사업에 뛰어들 때도 오랜 기간 근무한 어묵 장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다품종 소량 제품을 만드는 데 이들의 손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박 대표는 “기계가 들어올 때마다 남은 일손을 줄이기보다는 인력 재배치를 통해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쪽으로 고민한다”며 “수제 어묵도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지만 어묵 장인들이 있기에 대응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삼진식품의 수평적 조직문화는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삼진식품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대부분 정직원이다. 2015년 삼진식품 신입사원 입사 경쟁률이 160 대 1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산=이정선 중기선임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