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고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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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참상을 토양 삼아
전위적인 예술 작품 나와
나치 전체주의가 만든 '지옥'
극복하려 한 '결과물'
부조리극이 리얼리즘이 되는
참혹한 현실이 오늘날 韓의 모습
이응준 시인·소설가
전위적인 예술 작품 나와
나치 전체주의가 만든 '지옥'
극복하려 한 '결과물'
부조리극이 리얼리즘이 되는
참혹한 현실이 오늘날 韓의 모습
이응준 시인·소설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희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열외로 한다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대답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또한 문학 고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제목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읽어본 사람은 드문 경우라면 여기서도 <고도를 기다리며>는 정답으로서의 자격이 있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은 척 하기에 매우 적합한데, 누가 읽어도 내용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1막이 열리면, 국도의 나무 앞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Godot)’라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둘이 그러고 다닌 지는 50년 남짓이되, 고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며 심지어 고도가 실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와중에 포조가 럭키를 개처럼 목줄에 맨 채 몰고 등장하고, 소년이 찾아와 고도는 내일 온다고 알려준다. 제2막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며 기이한 느낌만 지루하게 증폭될 뿐이다.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고 포조는 눈이 멀어 있다. 다시 찾아온 소년이 오늘밤에는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한다. 블라디미르는 그럼 내일은 오는 거냐고 묻는다. 소년은 내일 온다고 말한다. 블라디미르가 달려들자, 소년은 쏜살 같이 달아난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다. 잠에서 깬 에스트라공은 멀리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둘은 나무에 목을 매달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에스트라공은 우리 이제 헤어지자고 한다. 블라디미르는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다시 목을 매 자살하자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둘은 떠나자고 합의한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막이 내리고, 끝. 대충 이런 연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40년대 후반에 작성돼 1952년에 발간됐다. 이런 전위적인 작품들이 출현하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 특히 ‘아우슈비츠(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가 그것이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럽 이성의 중심이었는데 ‘과학(Science)’으로 무장한 독일인들이 그들을 해충보다 못하게 절멸(絶滅)시키는 ‘아이러니의 지옥’이 펼쳐진 것이다. 서구 근대문명은 이성의 파란 합리성을 잃고 검게 변색돼버렸다. 1924년에 사망한 카프카를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이 재발견한 것, 192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쇤베르크의 무조음 음악이 1945년 전후부터 각광받은 것 등등은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어떻게든 해석하고 표현함으로써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발버둥이었다. 말끔한 근대가 종식되고 혼돈스러운 ‘현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아무리 겉으로는 멀쩡한 척해도 세상은 아수라장이며 ‘인간 존재’는 재판정에서 ‘정신병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이치를 모르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현대인이 아니다.
사회비평, 정치비평 같은 거 더 이상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우울한 마음에 요 며칠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읽으며 나는 뜻밖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해체된 플롯, 분열적인 스토리, 동문서답과 어불성설, 무료하고 무의미한 행동들, 그런 모든 염세적 난센스들이 전혀 난해하지가 않고 부조리극은커녕 있는 그대로 리얼리즘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더 어이가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세상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세상을 그렇지 않다고 오인하며 살벌한 확신과 어리석은 의지로 세상을 망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자신과 사회의 거울이 <고도를 기다리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춘향전>이나 <삼국지>처럼 믿고 발광하는 모든 행동들이 바로 우리를 지배하는 ‘온갖 천동설들’이자 대중파시즘이며 반지성주의다.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쨌거나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통을 견딘다. 둘째, 저 둘에게는 ‘슬픔의 품위’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로지 적의(hate)로만 가득 차 득시글거린다. 따라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용을 알 수 없어서 읽은 척 하기에 좋다던 내 말은 틀렸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방황하지만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는 용기 있는 인간들이며, 견디고 노력하는 이가 방황한다. 우리는 고도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제1막이 열리면, 국도의 나무 앞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Godot)’라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둘이 그러고 다닌 지는 50년 남짓이되, 고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며 심지어 고도가 실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와중에 포조가 럭키를 개처럼 목줄에 맨 채 몰고 등장하고, 소년이 찾아와 고도는 내일 온다고 알려준다. 제2막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며 기이한 느낌만 지루하게 증폭될 뿐이다.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고 포조는 눈이 멀어 있다. 다시 찾아온 소년이 오늘밤에는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한다. 블라디미르는 그럼 내일은 오는 거냐고 묻는다. 소년은 내일 온다고 말한다. 블라디미르가 달려들자, 소년은 쏜살 같이 달아난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다. 잠에서 깬 에스트라공은 멀리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둘은 나무에 목을 매달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에스트라공은 우리 이제 헤어지자고 한다. 블라디미르는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다시 목을 매 자살하자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둘은 떠나자고 합의한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막이 내리고, 끝. 대충 이런 연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40년대 후반에 작성돼 1952년에 발간됐다. 이런 전위적인 작품들이 출현하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 특히 ‘아우슈비츠(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가 그것이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럽 이성의 중심이었는데 ‘과학(Science)’으로 무장한 독일인들이 그들을 해충보다 못하게 절멸(絶滅)시키는 ‘아이러니의 지옥’이 펼쳐진 것이다. 서구 근대문명은 이성의 파란 합리성을 잃고 검게 변색돼버렸다. 1924년에 사망한 카프카를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이 재발견한 것, 192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쇤베르크의 무조음 음악이 1945년 전후부터 각광받은 것 등등은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어떻게든 해석하고 표현함으로써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발버둥이었다. 말끔한 근대가 종식되고 혼돈스러운 ‘현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아무리 겉으로는 멀쩡한 척해도 세상은 아수라장이며 ‘인간 존재’는 재판정에서 ‘정신병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이치를 모르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현대인이 아니다.
사회비평, 정치비평 같은 거 더 이상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우울한 마음에 요 며칠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읽으며 나는 뜻밖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해체된 플롯, 분열적인 스토리, 동문서답과 어불성설, 무료하고 무의미한 행동들, 그런 모든 염세적 난센스들이 전혀 난해하지가 않고 부조리극은커녕 있는 그대로 리얼리즘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더 어이가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세상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세상을 그렇지 않다고 오인하며 살벌한 확신과 어리석은 의지로 세상을 망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자신과 사회의 거울이 <고도를 기다리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춘향전>이나 <삼국지>처럼 믿고 발광하는 모든 행동들이 바로 우리를 지배하는 ‘온갖 천동설들’이자 대중파시즘이며 반지성주의다.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쨌거나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통을 견딘다. 둘째, 저 둘에게는 ‘슬픔의 품위’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로지 적의(hate)로만 가득 차 득시글거린다. 따라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용을 알 수 없어서 읽은 척 하기에 좋다던 내 말은 틀렸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방황하지만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는 용기 있는 인간들이며, 견디고 노력하는 이가 방황한다. 우리는 고도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