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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지앵들은 120년 전 파리 지하철역을 '괴물'이라 불렀다

아르누보(Art Nouveau)는 꽃과 식물에서 영감을 받은 모티프와 양식적이고 유려한 곡선 형태가 특징이다. 19세기 말(1890~1905)에 인기가 최고조에 달해 1차 세계 대전까지 성행했으며, 섬세한 덩굴손, 소용돌이치는 선 등 역동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했다. 아르누보는 예술을 일상생활과 동일시하고자 했기에 장신구, 금속공예, 유리공예 및 도자, 건축 등 생활과 밀접한 영역에 특히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르네 라리크 <티아라 빗과 몸통 장식> (1903~1904년), 프랑스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런던
르네 라리크 <티아라 빗과 몸통 장식> (1903~1904년), 프랑스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런던
아르누보 스타일은 주얼리 디자인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1900년 파리 국제 전시회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르네 라리크(René Lalique, 1860-1945)가 유리 작업으로 전환하기 이전, 아르누보 장신구 작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프랑스 시골의 자연뿐만 아니라 일본 모티프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는데, 다이아몬드와 같은 전형적인 보석과 거리를 두거나 유리, 뿔, 에나멜과 같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재와의 혼용을 통한 미묘한 효과에 중점을 두었다.

라리크가 재료를 선택했던 기준은 미적 효과와 예술적 세련미의 극대화였다. 동물의 뿔로 제작한 장신구 연작. 뿔은 얇게 다듬어졌고, 이는 다시 꽃, 파도, 나비 모양으로 조각되었다. 라리크의 창작물은 장신구 개념을 재정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메뚜기, 풍뎅이, 닭의 머리, 잠자리, 거미줄, 올빼미, 공작새 등의 모티프가 등장하는 그의 장신구는 장신구 제작과 보석 세공이 동일하다는 공식을 파괴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작업의 계기는 아르메니아계 영국인 석유 자본가 칼루스테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 1869-1955)의 의뢰였다. 석유 공학자였던 굴벤키안은 이라크 석유 회사(IPC)의 설립자였으며, 이라크 석유를 처음으로 개발했을 뿐 아니라 로열 더치 석유회사와 쉘의 합병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과 튀르키예, 오토만 제국 등을 넘나들며 사업을 확장했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6,000여 점의 동서양 예술품을 수집했다.

굴벤키안은 1895년경 라리크에게 약 145점의 장신구를 의뢰했고, 이 작업은 1912년경까지 이어졌으므로, 라리크는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굴베키안의 지지를 받은 셈이다. 라리크는 굴벤키안의 예술품 컬렉션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으며, ‘굴베키안이 없었다면 작품도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굴벤키안 뮤지엄에 < Dragonfly Broach >(1898)을 비롯한 라리크 장신구의 주요 작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보지다르 카라게오르게비치 왕자 디자인 및 제작 <페이퍼나이프, 과도, 커피스푼 세트> (1900년경), 프랑스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런던
보지다르 카라게오르게비치 왕자 디자인 및 제작 <페이퍼나이프, 과도, 커피스푼 세트> (1900년경), 프랑스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런던
페이퍼 나이프, 과도, 그리고 커피 여섯 개의 커피 스푼은 한눈에 보아도 아르누보 스타일 디자인이다. 손잡이 부분에 식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커피 스푼의 경우 손잡이 부분을 극도로 가늘게 디자인하여 마치 식물의 가느다란 줄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숟가락 부분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꽃이나 잎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뜨거운 커피에 넣은 설탕을 저어 녹게 만들 수는 있어도, 만약 이 작은 숟가락을 입 안에 넣는다면 입천장과 혓바닥에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물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커피의 유행에 아르누보 스타일이 침투했음을 증명한다. 이 도구들은 모두 은(銀)으로 만들어졌고 장신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유려하다.

이 은공예품의 제작자는 세르비아 왕조의 일원이었던 보지다르 카라게오르게비치 왕자(Bojidar Karageorgevitch, 1861-1908)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은제품을 의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자는 망명자였다. 1858년 혁명으로 카라게오르게비치 왕조가 세르비아에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했기에 그는 평생을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는 여행을 즐겨해 인도 38개 도시를 여행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 종교의식, 풍경, 건축에 관한 <마법에 걸린 인도 Enchanted India>라는 책도 출판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피가로(Figaro)> 등의 잡지에 기사를 기고했으며, 예술가, 작가, 시인, 철학자들과도 교류했다. 그중에는 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 미국의 배우이자 무용가 로이 풀러(Loie Fuller, 1862-1928), 화가 툴루즈-로트렉(Toulouse-Lautrec, 1864-1901), 그리고 러시아 무용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가 있다.

카라게오르게비치 왕자는 말년에 장식미술에 큰 관심을 가지고 파리 아틀리에에서 은공예품을 제작했다. 이 영원한 이방인은 자신의 그림, 삽화, 수채화, 은세공 작품을 1908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처음 전시했다. 그가 디자인하고 제작에 참여했던 사물에는 BK라는 서명을 새겼다. 안타깝게도 1908년 그는 베르사유에서 마흔일곱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루이 마조렐 디자인 및 제작 <안락의자> (1899-1900년), 프랑스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런던
루이 마조렐 디자인 및 제작 <안락의자> (1899-1900년), 프랑스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런던
이 아르누보 양식 안락의자는 1899-19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1900년 파리 국제 박람회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이 프랑스 가구는 영국 평론가들에게 호의적인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이 의자가 너무 장식적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영국에 퍼져있던 디자인 개혁 및 미술공예운동의 디자인 철학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의자는 미술상 조지 도널드슨 경(Sir George Donaldson, 1845-1925)이 파리 박람회에서 구입했던 응용 예술 컬렉션 중 하나였고, 그는 이를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A)에 기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뮤지엄 측에서 왜 이 의자를 소장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미온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이 안락의자는 '비교적 단순하다'라는 애매한 이유로 승인을 받아 소장품이 되었다.

이 의자는 파리박람회를 위해 프랑스 낭시에서 루이 마조렐(Louis Majorelle, 1859-1926)이 디자인하고 호두나무로 제작한 것이다. 마조렐은 아르누보의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이자 가구 제작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화가 훈련을 받은 후 1879년 아버지의 가구 제작 사업을 물려받아 대중적인 로코코 복고 양식 가구 제작으로 시작해 1890년대부터 아르누보풍 가구 제작으로 전환했다. 자연주의적인 꽃 모티브를 사용하여 디자인한 이 안락의자. 이 의자는 V&A의 소장 이유처럼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식물 모티프를 반추상적 모티브로 재해석했기에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조새미 공예 연구가•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