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저마다의 바다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의 리처드 미즈락 개인전에 걸린 ‘MOB Super grid #1’(2012).   페이스갤러리 제공
사람들과 저마다의 바다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의 리처드 미즈락 개인전에 걸린 ‘MOB Super grid #1’(2012). 페이스갤러리 제공
현대 컬러 포토그래피의 르네상스를 이끈 리처드 미즈락(74). 미즈락의 반세기 사진 여정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선보였다.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의 개인전에서다.

미즈락은 1970년대부터 자연을 촬영한 대형 컬러 사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10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처음 공개했을 때 배경 화면이 미즈락의 사진이었다. ‘사막 캔토스’ 등 그의 대표작은 뉴욕 현대미술관과 휘트니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등 유수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시장 1층부터 넘실대는 파도가 시선을 압도한다. 집채만 한 파도에 위태롭게 올라탄 서퍼를 가로 227.3㎝, 세로 147.3㎝ 크기로 인화한 ‘이카로스 모음집’(2019)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며 추락한 이카로스처럼, 금단의 영역을 넘보는 무모한 인간을 지적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의 배경들을 묶는 키워드는 캔토스다. 20세기 미국의 대표 시인 에즈라 파운드(1885~1972)의 연작 장편시 <캔토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파운드가 고대 그리스부터 오늘날까지 정치사를 포괄한 대서사시를 남겼다면 미즈락은 환경·반전(反戰)·동물권 운동 등 사회적 이슈의 최전선을 한데 엮었다. 미국 유타주의 메마른 소금사막, 네바다주의 핵실험 시설, 동물 사체 매립지 등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장소들이다. 미즈락이 동시대에 가장 정치적인 사진가로 꼽히는 이유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2층에 걸린 ‘코끼리 우화’ 시리즈 10점. 코로나19가 창궐한 2020~2021년 제작한 신작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선 낸시 프랜드 프리츠커 정신병동에 걸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정신병동 측이 작품을 의뢰했을 때 건 조건은 단 한 가지. ‘정치적인 것은 안 된다’였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고심하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전에 찍고 버려둔 하와이의 대나무숲 이미지였다. ‘실패작’이라고 여겼던 사진에 새 숨결을 불어 넣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작가는 “원본 이미지는 지금껏 촬영한 사진 중 가장 좋아하지 않았던 작품”이라며 “흥미롭지 않은 것으로부터 흥미로운 요소를 찾는 게 작업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는 집에서 포토샵을 진득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진 일부분을 확대하거나 축소하고, 색상을 반전하는 등 디지털 작업을 거쳤다. 전시회에 원본을 찾기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인 사진이 다수 걸려 있는 이유다.

‘코끼리 우화’ 연작은 여섯 명의 맹인 승려가 코끼리를 만져보고 저마다 다른 모습을 말한다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우화 속 코끼리는 인생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죠. 정신병동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각자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우리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습니다.” 전시는 6월 15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