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朴婉緖, 1931~2011) 선생은 40세 때인 1970년에 문단에 나왔으니 인생 80년 중 딱 절반을 작가로서 살았다. ‘완서’라는 이름과는 달리 ‘순한 실마리’보다는 ‘얽히고설킨’ 매듭을 푸느라 힘겨운 삶을 산 작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를 거쳐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젊은 시절은 여타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박완서의 작가로서의 삶은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 시작된다. 작가 세계에 진입하려는 노력도, 이렇다 할 계기도 없이 그렇게 평범한 여성으로 살아갈 것만 같았던 선생은 마흔의 나이에 그야말로 늦깎이로서의 기염을 토하며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박완서 선생은 “중산층의 소시민적 삶의 방식과 풍속의 예리한 비판”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현실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우리 문단을 풍성하게 채워준 작가가 되었다. 동시에 펴내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며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가 박완서 / 사진 출처. 한경DB
작가 박완서 / 사진 출처. 한경DB
그의 작품 활동과 작품성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평단(評壇)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장편 「살아 있는 날의 시작」으로 한국문학작가상(1979), 「엄마의 말뚝2」로 이상문학상(1981),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현대문학상(1993),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동인문학상(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대산문학상(1997),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만해문학상(1999), 「그리움을 위하여」로 황순원문학상(2001)을 수상하였다. 2004년에는 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 이전에 ‘54년생 차문경’이 있었다

박완서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1989년 11월 20일 출판사 ‘삼진기획’에서 초판 1쇄가 나왔다. 한마디로 ‘중년 여성의 현실을 다룬 작품’이다.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 이어 연작 「서울 사람들」 그리고 단편 「저문 날의 삽화(2)」가 함께 실려 있다. 작가의 서문이랄 수 있는, 작품 말미에 실려 있는 ‘책 뒤에’라는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건 대단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한 평범한 여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직도 꿈을 못 버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꿈으로부터 배반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창출해내는 게 어찌 여자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인간의 운명이지요.


이 글 작은 제목에서 ‘82년생 김지영’에 빗대어 ‘54년생 차문경’이라고 표현한 것은 1988년에 《여성신문》 연재에 이어 1989년에 단행본으로 발행된 장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주인공인 ‘차문경’이 또 다른 주인공 ‘김혁주’와 35세 동갑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젠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엔 확고했던 ‘호주제’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남성우월주의, 곧 남성에 종속된 여성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함으로써 ‘남녀평등’이라는 의제를 촉발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우리 사회에 경각심과 함께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 작품이 바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였다. 실제로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1989년 11월 발행되자마자 반향을 몰고 와 1990년 전체 베스트셀러 2위에 오를 정도로 많이 팔리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품 내용을 살펴보면, 결혼에 한 번 실패한 차문경, 그리고 부인과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혁주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홀로되었다는 공통점을 안고 동창회에서 재회한 이후 곧바로 사랑에 빠진다. 문경은 부인과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혁주를 생각해 3년이 지난 뒤 결혼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둘의 결혼은 혁주의 변심으로 깨지고 만다. 문경에게는 미혼모라는 굴레와 함께 아비 없는 아이를 데리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싱글맘으로서의 가난한 삶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7년이 흐른 어느 날, 혁주는 다시 문경의 인생에 등장한다. 막강한 경제력과 함께 다른 여자와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지지 못한 아들을 빼앗기 위해서…….

차문경 여사
여사가 본인의 아이를 낳았다구요?
여사의 말귀를 못 알아듣겠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사로부터 그와 같은 협박을 당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본인이 기억하고 있음을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앞으로 다시 이런 허무맹랑한 협박으로 본인의 신성한 가정의 평화가 위협을 받을 시는 여사의 정신상태를 의심할 것이며 본인도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임을 경고합니다.
x년 x월 x일 김혁주

다행히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공식적인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판사가 그 편지를 읽었다.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여서 문경이도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그런 지독한 사연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도 있구나. 그 여자는 아득한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신청인이 x년 x월 x일 이런 편지를 피신청인에게 한 게 사실입니까?”
<중략>
보름 후 언도 공판이 있기 전에 그 여자는 혁주가 고소를 취했다는 걸 알았다.

윗글은 작품 속에서 문경이 “몇 월 며칠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당신과 나의 아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인정해줘서 사실대로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 혁주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육필은 단 한 자도 들어있지 않”게 “공문 조로 타이핑된 사연” “끄트머리 성명 삼자까지 타이핑을 했으면서도 무슨 생각에선지 이름 다음에다 인주빛깔도 선명하게 날인을 하고 있었”던 편지다. 그리고 아랫글은 작품 마지막 부분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으리라.

꿈속인 듯 몽환적이되 정갈한 표지 디자인, 그리고 인주빛깔 선명한 인지를 붙인 책
[차례대로] 박완서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초판본의 앞표지와 뒤표지 / 이미지 제공. 김기태
[차례대로] 박완서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초판본의 앞표지와 뒤표지 / 이미지 제공. 김기태
먼저 이 소설책의 판형은 가로 152mm, 세로 225mm 크기의 A5 신판형(일명 신국판)이며, 무선철 제책 형식으로 앞뒤 표지에 날개가 접혀 있다. 앞날개에는 박완서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의 얼굴 사진과 함께 작가 소개가 담겨 있는데, 하단에 보면 ‘표지디자인―정병규디자인실’이라고 적힌 활자가 눈에 띈다. 그러니까 이 책의 표지를 디자인한 사람이 바로 정병규 선생이었던 것이다.
박완서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초판본의 표지 앞날개 / 이미지 제공. 김기태
박완서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초판본의 표지 앞날개 / 이미지 제공. 김기태
초판본을 모으다 보니 언제부턴가 표지에 ‘정병규’란 이름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가 누구이던가. 정병규(1946~ )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 북디자인을 개척한 1세대로서 대표적인 북디자이너다. 1975년 민음사 편집부장을 맡은 이래 홍성사 주간을 거쳐 ‘정병규디자인실’을 운영하면서 민음사를 비롯한 주요 출판사의 대표적인 단행본 표지와 본문 디자인마다 손길을 보탰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또한 정병규 선생의 디자인 감각에 힘입어 출생신고를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간기면을 보면, 간단한 작가 소개와 함께 책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정보들이 담겨 있는데,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인지(印紙)에 찍힌 도장의 인주가 앞쪽 면에 진하게 묻어날 정도로 선명하다는 점, 그리고 하단에 그 이전의 책들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이른바 ⓒ표시가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표시는 1987년 10월부터 우리나라에서 효력이 발생한 ‘세계저작권협약(UCC)’의 권고사항으로서 그 회원국임을 나타내는 표시라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여기서 ⓒ표시는 [ⓒ, 저작재산권자, 최초발행년도]로서 나타내는데, ⓒ는 당연히 ‘copyright’ 즉, ‘저작권’을 뜻하는 표시다. 지금으로부터 30년이 더 지난 시기이긴 하지만 당시 책값이 3,500원에 불과했었다는 것도 이채롭다.
박완서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초판본의 간기면 / 이미지 제공. 김기태
박완서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초판본의 간기면 / 이미지 제공. 김기태
하나 더, 요즈음엔 보기 어려운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독자용 엽서’다. 일반적으로 독자용 엽서는 본책 인쇄와 달리 별도 인쇄 후 제본 과정에서 접지뽑기(접지를 마친 대수별 본문 용지를 한 권으로 합치는 과정)를 할 때 끼워 넣는다. 이 책에서는 마지막 본문 용지와 면지(표지와 본문 사이의 별도 지면)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용 엽서 / 이미지 제공. 김기태
독자용 엽서 / 이미지 제공. 김기태
재미있는 것은 이 엽서의 용도가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참고하여 좋은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 엽서는 저희 출판기획의 소중한 자료로 활용됩니다.”라고 했지만, 실상은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이는 독자에게 요구하는 정보의 내용에서 금세 확인된다. 예컨대, ‘이 책을 사게 된 동기’, ‘많이 읽는 책의 종류’, ‘좋아하는 작가’, ‘구독하는 신문’, ‘구독하는 잡지’ 그리고 ‘책을 선택하는 성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떤 항목은 책을 널리 알림에 있어 광고의 효력이 좋은 매체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고, 또 어떤 항목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책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출판사에서 알고 싶은 것들이다. ‘책을 선택하는 성향’의 하위 항목을 보면 이 같은 의도가 좀 더 확실해진다.

장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도 했다. 먼저 KBS 2TV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돼 1990년 10월 3일부터 1990년 10월 25일까지 매주 수요일, 목요일 밤 9시 50분에 방영되었다. 그다음으로 MBC에서는 문학작품을 드라마화한 ‘소설극장’이란 타이틀을 단 아침드라마로 이 작품을 각색하여 2003년 3월 3일부터 2003년 9월 20일까지 30분짜리 168부작으로 방영한 바 있다. 또, 책으로는 처음 발행되었던 삼진기획을 떠나 1999년 6월에는 ‘세계사’, 2007년 9월에는 ‘문이당’, 2012년 1월에 다시 ‘세계사’에서 각각 새 옷을 입고 재발행되어 지금까지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KBS 드라마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1회)의 한 장면 /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KBS 같이삽시다'
KBS 드라마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1회)의 한 장면 /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KBS 같이삽시다'
사족 하나 더. 이 책이 나오고 10년이 다 되어갈 무렵, 당시 박사과정을 마치고 이후의 길을 모색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나는 출판사 ‘삼진기획’의 기획편집 책임자로 입사하게 된다. 2001년 3월 대학 전임교수로 가기 전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셈이다. 그때 만든 책이 2000년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던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이었다. 10년이란 세월을 사이에 두고 같은 출판사에서 태어난 책들이 지금은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작가의 숨결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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