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넥스포 아시아 2024’를 찾은 참가자들이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연합회 부스에서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비넥스포지엄 제공
‘비넥스포 아시아 2024’를 찾은 참가자들이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연합회 부스에서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비넥스포지엄 제공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유산, 헤리티지. 흔히 헤리티지는 브랜드의 생명이라고 한다. 단순한 상품을 명품으로 바꿔주는 게 바로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와인이 대표적이다. 명품 와인이 되려면 맛은 기본이고 수백 년에 걸친 역사와 스토리가 필요하다. 파블로 피카소 등 세계적 예술가가 사랑한 ‘샤토 무통 로칠드’,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생산된 ‘샤토 바따이’, 윈스턴 처칠이 승리할 때도 패배할 때도 찾은 샴페인 ‘폴 로저’…. 와인을 마시는 것은 역사를 마시는 일과 같다.

아시아에서 그런 와인 헤리티지를 보유한 곳은 홍콩이다. 세계 3대 와인박람회로 통하는 ‘비넥스포’가 1998년 아시아 첫 진출지로 꼽은 곳이다. 코로나19와 정치적 불안이 홍콩을 흔들기 전까지 20여 년간 전 세계 소믈리에, 와이너리 대표, 바이어들이 2년마다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홍콩을 아시아 와인 허브로 거듭나게 한 비넥스포 아시아가 돌아왔다. 비넥스포 아시아가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건 2018년. 코로나19로 인한 4년의 공백, 지난해 싱가포르에서의 개최를 거쳐 6년 만에 홍콩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달 28~30일 사흘간 홍콩컨벤션센터(HKCEC)에서 만난 세계 와인 관계자들은 “홍콩이 지난 20년간 쌓아온 헤리티지는 무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6년 만에 돌아온 아시아 최대 와인 축제를 세 가지 포인트로 정리했다.

홍콩에 돌아온 1000여 개 와이너리

비넥스포 아시아의 매력은 두 가지다.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칠레 스페인 중국 등 세계 와이너리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과 이들의 대표 와인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는 점. 올해는 35개국 1000여 개 와이너리가 참가했다. 그중 인기는 단연 프랑스 보르도의 ‘바롱 필립 드 로칠드’ 부스. 샤토 무통 로칠드 등 세계적 와인을 탄생시킨 전설적 와이너리다. 유럽의 작은 와인숍을 옮겨놓은 듯한 부스에는 대표 와인 등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국에 없는 새로운 와인을 만날 수 있는 것도 비넥스포의 묘미다. 그중 하나는 미국 나파밸리 부스에 등장한 드보시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방탕한 사람(debauchee)’이라는 이름처럼 화려하면서도 나파밸리 특유의 단단함이 특징인 와인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바이어는 “와인 수요가 줄었다고들 하지만 나파밸리 같은 프리미엄 와인의 수요는 굳건하다”고 했다.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비넥스포 아시아 2024’에서 참가자들이 대화하고 있다.  비넥스포지엄 제공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비넥스포 아시아 2024’에서 참가자들이 대화하고 있다. 비넥스포지엄 제공

와인의 진화, 오가닉 와인

포도밭 없는 '와이너리 名家'…홍콩에 취하다
굵직한 와이너리 부스를 돌다 보면 ‘WOW’라고 적힌 거대한 부스가 눈에 띈다. 심지어 VIP 라운지 바로 옆, 꽤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부스 주인공은 ‘오가닉 와인 앤드 스피릿(증류주)’이다. WOW는 ‘웰컴 투 디 오가닉 월드’의 앞 글자를 딴 것. 기후위기와 환경 파괴에 대한 대응이 와인 산업의 주요 이슈가 됐다는 점을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오가닉 와인은 일반 와인과 달리 포도가 자라는 토양에 화학 비료나 제초제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화학 첨가물을 넣지 않고 유기농 방식으로 와인을 추출해야만 오가닉 와인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 이렇게 친환경적이라도 맛이 좋아야 사람들이 찾는 법. 지금껏 오가닉은 일반 주류만큼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 약점이었지만, 이곳에선 피노누아·피노블랑(이탈리아 라 자라), 보드카·진·럼(호주 플루노 스피리츠) 등 여러 오가닉 와인과 스피릿을 마실 수 있다.

존재감 뽐낸 한국 전통주

비넥스포는 북미와 유럽만의 축제가 아니다. 올해는 한국 기업이 만든 샴페인이 처음으로 비넥스포 아시아에 부스를 차렸다. 인터리커의 샴페인 ‘골든블랑’이다. 골든블랑은 100% 프랑스에서 생산하지만, 브랜드 기획부터 운영까지 모두 인터리커가 이끌었다. 특히 골드, 핑크, 블루 등 화려한 메탈 보틀 디자인 덕에 중화권 바이어의 문의가 이어졌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한국 전통주도 처음으로 비넥스포에 진출했다. 충북 청주에 있는 전통주 양조장 화양이 내놓은 ‘풍정사계’다. 예부터 왕실에서 쓰던 누룩인 ‘향온곡’으로 빚어 부담스럽지 않은 구수함이 특징이다. 풍정사계 관계자는 “프랑스 샴페인, 일본 사케와 확실히 차별화되면서도 깔끔한 맛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비넥스포가 이번 행사를 위해 준비한 50여 개 프리미엄 세션 가운데 ‘한국 와인 시장’을 다루는 세션이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와인 분야 최고 수준 자격증인 ‘마스터 오브 와인’을 거머쥔 지니 조 리가 사회를 맡은 이 세션에선 각국 와이너리 대표, 바이어 등이 참석해 유자 막걸리를 즐겼다.

홍콩=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