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탕핑만이 대안인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한 10년 전쯤 배우 유해진이 나온 신용카드 CF 대사다. 할인 혜택이 있는 카드 종류가 너무 많은 게 귀찮은 유해진의 독백이다. 문법을 파괴한 중독성 강한 표현으로 빅히트했다. 비슷한 뉘앙스의 웹툰 대사도 있다. “사실 별로 하는 거 없지만 오늘은 더 적극적으로 안 할 거야.”

이 말들은 ‘이생망’이라며 절망하는 ‘N포세대’의 심정을 저격했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에서부터, 내 집 마련·인간관계·꿈·희망·외모·건강까지 포기한 9포 세대까지 있다. 일본에는 ‘사토리 세대’가 있다. 학벌·직업·외모 모두 중간만 하고 살자는 주의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젊은 층을 가리키는 말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중국의 ‘탕핑(躺平)’이다. 드러누울 당(躺)에 평평할 평(平), 편하게 드러눕는다는 뜻으로 최소한의 생계비만 벌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내는 것이다. 2021년 4월 중국 포털 사이트 바이두 게시판에 올라 온 ‘탕핑이 곧 정의(躺平卽是正義)’라는 글을 계기로 급속도로 확산했다. “2년간 일하지 않았다. 놀기만 했지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 취업난에 시달리는 중국 청년들이 환호했다.

이 말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다시 회자하고 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집단 사직한 전공의들의 전략이 ‘탕핑 모드’다. 그들은 정부와 대화하지 않는 것은 물론 피케팅, 집회조차 없다. 중국 탕핑족처럼 대부분 그냥 집에 있거나 여행 다니면서 쉬고 있다. 정부, 의사협회, 교수는 물론 전공의 단체 대표조차 믿지 않는다. 가장 개인화된 세대 특징에 불신 기조까지 더해지면서 시종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전공의 이탈 사태가 100일을 넘었다. 온 나라를 뒤흔든 집단행동을 해놓고 모든 접촉을 회피하는 이들에게 “탕핑만이 대안인가”라는 쓴소리가 나온다. 환자단체 대표는 이렇게 호소한다. “그 100일을 힘들게 버텨왔다. 일단 돌아와 달라”고. 전공의들이 의사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았다면, ‘책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할 때가 됐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