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1만명의 선비가 상소를 올리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정조
1792년 음력 윤4월, 영남 남인으로 불리던 경상도 유생들이 가족의 만류를 뒤로한 채 서울로 향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창덕궁 돈화문에 모여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서다.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여정에 오른 유생은 1만 명. 안동 하회마을을 비롯해 경상도 곳곳에서 온 영남 선비들은 임금을 만나려고 고향 땅을 떠났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이 쓴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는 그가 2021년 내놓은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1792년 일어난 만인소운동을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하게 재현했다. 책은 당시 영남 남인들이 왕에게 상소를 올리려고 고향을 떠나 한양을 거쳐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두 달을 담았다.

[책마을] 1만명의 선비가 상소를 올리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정조
만인소운동은 정조에게 “경종을 왕으로 여기지 않는 행태를 보인 류성한을 처벌하라”는 이야기였다. 그 이면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담하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자들(노론)을 정리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한 세기 넘도록 중앙 정치에서 배제된 영남 사림 세력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돈화문에 모인 선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정조는 이들을 눈앞에 불러 직접 상소문을 읽게 했다. 내용을 듣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사도세자 사건의 배후에 있던 이들을 단죄하라는 선비들의 목소리에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책은 그 모습 또한 영화를 보여주듯 류이좌의 시선을 빌려 생생하게 전달한다. 눈물을 흘리는 정조의 모습을 두고 “용안 위로 촛농을 닮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정조는 상소를 듣고도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대신 영남 선비들을 회유하는 길을 택했다. 영남 만인소운동의 한계였다. 그러나 영남만인소가 역사적으로 남긴 의미는 크다.

저자는 책에서 “선비들의 집단 상소가 자발적 참여, 전체 협의, 엄격한 절차를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론’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됐다”며 “그렇기 때문에 상소가 정치를 바꾸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