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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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역사는 곧 유럽의 역사였다. 유럽인은 활동 반경을 꾸준히 넓혔다. 처음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그다음엔 태평양으로. 반면 아시아인은 해양 진출에 무관심했다. 중국 명나라 때 정화가 아프리카까지 가긴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진취적이고 모험심 가득한 유럽인, 자기 나라에만 틀어박힌 아시아인. 우리는 그렇게 둘을 대비해 생각한다. 유럽이 세계를 장악한 원동력도 여기에서 찾는다.

[책마을] 아시아의 바다는 한순간도 잠잠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학계에선 태평양과 아시아 바닷길 등 그동안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지역의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에릭 탈리아코초 미국 코넬대 역사학과 교수가 쓴 <아시아 500년 해양사>도 바로 그런 책이다. 아시아 해양 교류가 본격화된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약 500년에 걸쳐 아시아 곳곳의 풍경을 다채롭게 펼쳐낸다. 먼 나라와 무역을 하고 교류하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저자는 아프리카 남동부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 동쪽 해안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그 흔적을 찾는다. 이들은 아시아인을 닮았다. 마다가스카르 서쪽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유전자를 검사했더니 혈통의 기원이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 있었다. 학자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1000년도 전부터 아프리카와 교류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중국의 흔적이 보인다. 이곳에선 해변을 걸을 때 명나라 청화백자 파편에 발을 베일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저자는 “중국 기록을 보면 적어도 송나라 때 이미 아프리카가 알려져 있음이 분명하다”고 했다. 정화의 대원정이 중국 해외 진출의 정점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500년 역사’라고 했지만 책이 주로 다루는 부분은 1800년대 이후부터다. 유럽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무역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그 중심 무대는 남중국해였다. 10여 개국 사이에 자리한 남중국해는 밀수의 중심지기도 했다. 중국 선박들이 이곳저곳 들락거리며 상품을 운송했고, 해안가를 따라 중국인 마을이 들어섰다. 술이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아편도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곳에선 밀수가 끊이지 않는다. 상아, 천산갑뿐 아니라 각종 마약이 거래된다.

무역은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했다. 이는 주요 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쑤저우와 항저우, 일본 교토, 인도 무굴제국의 델리 등은 내륙 도시다. 국내 지향적이었다. 반면 동남아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는 바닷가에 있는 항구 도시인 경우가 많다.

주요 동남아 항구 도시에는 ‘샤흐반다르’라고 하는 항만관리소장이 있었다. 도시 지배자 다음으로 높은 위치였는데, 자신이 소속된 도시 국가를 대신해 무역을 끌어들이고 관리하고 선전하는 일을 했다. 통상 외국인이었고, 여러 언어를 쓸 줄 아는 해결사였다.

“샤흐반다르가 운영하는 항구들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었다. 대외 지향성, 감수성, 외부인을 수용할 의지와 능력, 그리고 이런 것들이 만들어낸 다문화주의였다.”

책에서 한국은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은둔 국가였던 탓이다. 19세기 말 러시아가 부산항 인근에 러시아 극동 함대를 위한 기반 시설을 마련하려고 애를 썼다고 잠깐 언급할 뿐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해양사를 간결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한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자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외부 세계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은 큰 문제다. 특히 동남아와 인도, 아프리카 등은 더 관심 밖이다. 하지만 아시아는 예로부터 서쪽에서 동쪽까지 각종 무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책은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흠이 없지 않다.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중심축이 없다. 여러 지역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낼 뿐이다. 아시아 국가들이 해상 무역에 소극적이었다는 오해와 편견을 벗겨내겠다고 했지만, 그 반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 동인은 무엇이었는지, 왜 더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는지, 아시아 전반의 경제 성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파고들지 않는다. 여러모로 아쉬운 책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