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명 작가 "미래 소설 써놨더니 이미 현실… 다시 썼죠"
8년 전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대국에서, 이정명 작가(59·사진)의 주목을 끈 건 이세돌도, 알파고도 아니었다. 당시 이 작가는 알파고의 수를 대신 놓은 딥마인드 연구원 아자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국 중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으며 AI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 작가는 인류의 미래를 봤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 인기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쓴 이정명이 최근 새로 낸 장편소설 <안티 사피엔스>는 바로 이때부터 구상이 시작됐다. AI가 초고도로 발달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악(惡)을 학습한 AI가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 속에선 '프리젠터'란 새로운 직업이 등장한다. 현실과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자잘한 심부름을 하는 미래의 심부름꾼이다. 육체가 없는 가상 인간, AI의 명령을 받고 살인 등 범죄까지 서슴지 않는 프리젠터는 기계의 지배를 받는 인류를 상징한다. 이 작가는 "인류가 미래에 본인의 의지 없이 고도로 발달한 기계의 손발로 전락할 수도 있겠단 두려움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AI가 창조주인 인간을 위협하는 건 어쩌면 이미 현실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잘못된 편견이나 욕망 등을 데이터로 학습한 AI가 편향적인 알고리즘이나 차별을 강화하는 답변 등으로 반대로 인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이 작가는 "AI가 학습하는 건 결국 인간"이라며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인간 자체에 대한 통찰을 좀더 깊이 하는 게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이어 "AI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가 앞으로 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어떤 윤리를 갖춰야 하는지 등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소설을 썼다"고 덧붙였다.
이정명 작가 "미래 소설 써놨더니 이미 현실… 다시 썼죠"
이번 작품은 같은 상황을 각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다양하게 보여준다. 일종의 모자이크 형식으로 조각, 조각의 관점을 모아 전체 이야기를 완성하는 형식이다. 이 작가는 "AI와 인간이 대립하는 긴박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반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에게 장편소설 쓰기는 아주 무거운 짐을 싣고 떠나는 긴 여행"이라며 "무엇을 싣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운송수단을 가지고 가느냐, 즉 이야기의 효과적인 형식을 찾는 데 가장 신경을 많이 쓴다"고 말했다.

집필 과정에서 AI 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2022년 말 초고를 끝냈을 무렵 생성형 AI 챗GPT가 등장해 이 작가가 소설 속에서 묘사한 근미래의 모습이 현실이 돼버린 것. 그는 "현실에서 이미 구현이 된 기술은 걷어내고 기술을 좀더 고도화하는 식으로 원고를 수정했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적어도 3~4년마다 장편소설을 꾸준히 낸다. 동시에 여러 작품을 쓰기도 한다. 계속 '쓸 수 있는 힘'은 습관에서 온다. 이 작가는 "일부러 직장 생활을 하는 것처럼 정해진 시간에 작업실에 출퇴근하며 글을 쓴다"며 "앉아 있을 체력을 만들기 위해 아침 운동을 한 뒤 작업실에 가는 등 운동과 글쓰기를 고정된 습관으로 만든 것이 지치지 않고 계속 쓰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음 소설은 여러 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