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65점짜리야. 이제 (명당도) 씨가 말랐어."

지난 2월 개봉한 '파묘'에서 지관(地官)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의 말이다. 조선시대부터 좋다는 땅마다 묫자리가 들어섰을 것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명당이 척척 나오냐는 동료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영화 자체는 허구에 기반하지만, 사후세계에 관한 선조들의 오랜 관심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충분한 대사다.
임영주의 영상작업 '미련 未練 Mi-ryeon'(2024) 스틸 이미지. /페리지갤러리 제공
임영주의 영상작업 '미련 未練 Mi-ryeon'(2024) 스틸 이미지. /페리지갤러리 제공
다른 차원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다뤄온 설치예술가 임영주(42)도 비슷한 고민을 가졌다. 3년 전 수술을 앞두고 전신마취 상태로 병원 천장을 올려다본 게 계기였다. 생사의 기로에 선 작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죽은 이의 눈에는 무엇이 보일까. '100점짜리' 명당 어디 없을까.

퇴원한 임 작가는 전국의 양지바른 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음에 쏙 드는 묫자리를 경기도 파주에서 찾았지만, 이미 선점한 주인이 있었다. "첩장(한 묫자리에 관이 중첩해서 묻히는 것)을 결심했죠. 물론 실제 세계가 아닌, 가상현실(VR)에서요."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 개인전 '미련'의 전시 전경 /페리지갤러리 제공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 개인전 '미련'의 전시 전경 /페리지갤러리 제공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의 개인전은 작가가 상상한 사후세계의 여정을 가상현실 세계에서 재현한다. 전시 제목은 '미련 未練 Mi-ryeon'. 망자(亡者), 은행나무 화석, 박제된 철새 등 숨이 멎은 대상들이 미련 가득한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을 묘사했다.

전시 공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물인터넷 기술 '라이다(LiDar)'로 설계한 VR 체험관, 그리고 영상·소리·설치 작업이 들어선 본전시장이다. VR 장치에서 체험자가 바라본 세상 일부는 본전시장 영상에 실시간으로 연동된다. 각자 경험하는 죽음이 천차만별이듯, 관객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시가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 개인전 '미련'의 전시 전경 /페리지갤러리 제공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 개인전 '미련'의 전시 전경 /페리지갤러리 제공
사전 예약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VR 작업은 관처럼 놓인 침상에 눕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손에 쥐어진 조약돌의 은은한 온기, 코끝에 맴도는 쑥 내음이 오감을 자극한다. 얼굴에 착용한 VR 고글에선 일인칭 시점으로 묫자리를 찾아가는 영상이 상영된다. 관객은 긴 여정 끝에 메타버스 속 파주에 안치된다. 흑백이 반전된 세계에서 가족과 지인, 무덤 관리인이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는 화면을 연출했다.

본전시장에 상영되는 비디오 작업은 철새를 추적하는 조류연구자들의 이야기다. 작가가 2년간 충남 서산과 전북 금강 유역의 철새도래지에서 촬영한 영상이다. 천문대의 문이 열리며 막을 올리는 영상은 어느 박물관에 박제된 철새의 시선에서 마무리된다.
임영주의 영상작업 '미련 未練 Mi-ryeon'(2024)의 스틸 이미지. /페리지갤러리 제공
임영주의 영상작업 '미련 未練 Mi-ryeon'(2024)의 스틸 이미지. /페리지갤러리 제공
"옛 선조들은 북녘으로 날아가는 철새가 저승에 다녀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마다 새의 형상을 본뜬 솟대가 수호신처럼 여겨진 이유죠. 박제된 채 영생을 살아가는 조류의 관점에서 사후세계를 상상한 작품입니다."

비디오 작업 주위로 전시된 설치작업도 흥미롭다. 수석(壽石)을 진열하는 데 사용하는 나무 받침대를 '돌의 관(棺)'에 빗댄 조각, 유체 이탈을 연출한 듯 몸에서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시체 조각 등이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 개인전 '미련'의 전시 전경 /페리지갤러리 제공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 개인전 '미련'의 전시 전경 /페리지갤러리 제공
한눈에 이해되는 만만한 전시는 아니다. 60분가량 이어지는 영상을 천천히 뜯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무언가 감상하기 위해 전시장을 찾은 관객을 상대로 '눈 감으세요'란 자막을 송출하고, 난데없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영상이 나오는 등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품에 관한 친절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미련'으로 남는 이유다. 전시는 7월 27일까지.

안시욱 기자
임영주의 영상작업 '미련 未練 Mi-ryeon'(2024)의 스틸 이미지. /페리지갤러리 제공
임영주의 영상작업 '미련 未練 Mi-ryeon'(2024)의 스틸 이미지. /페리지갤러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