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들면 창덕궁 담장…바람·햇살·향이 채우는 '차경'의 완성
창덕궁을 둘러싼 서울 원서동 일대는 모든 건물이 궁궐 담장을 따라 낮게 지어졌다. 어디에서든 담장보다 높게 솟은 나무줄기가 보이곤 한다. 바람을 타고 후원의 나무가 소리를 전해오는 동네. 그런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한 남자는 원서동에 카페를 개점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골목길의 고요한 아름다움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창문 너머 창덕궁 담장이 보이고 바람과 햇살이 공간을 채우는 TXT 이야기다.

TXT를 만든 이수환 대표는 공간의 모든 요소가 같은 말을 하길 바랐다. ‘미세기문을 밀어내는 힘이 어느 정도가 돼야 적당할까’부터 고민했다. 그는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결코 가볍지 않기를 원했다. 그 일이 또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 그만큼의 힘을 찾아 문의 무게를 정하고 자석의 힘을 빌려 리듬감을 더했다. 문을 여는 행위는 그곳을 찾은 이가 가장 먼저 겪는 소리 없는 인사나 다름없다. 그가 결정한 출입문 무게는 조금 엄격했지만 그만한 정중함을 지니고 있다.
연필로 주문서를 작성하면 그날 준비된 커피를 취향에 맞게 내려준다.
연필로 주문서를 작성하면 그날 준비된 커피를 취향에 맞게 내려준다.
커피 바를 마주 본 쪽으로 프레임 없는 미닫이창이 눈에 들어온다. 창밖으로는 궁궐 빨래터로 향하는 길이 이어져 있고, 담장을 따라 지어진 한옥의 낮은 지붕이 보인다. 그 지붕 위에 때때로 낙엽과 눈이 쌓이고, 녹음이 어우러지며, 빗방울이 부딪혀 계절의 빛과 소리를 전한다.

출입구와 창이 있는 맞은편의 두 벽은 다른 방식으로 바깥 풍경을 이어 담았다. 겉으로 본드와 실리콘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얇은 목재를 격자무늬로 엮어 붙였다. 천장에 붙은 냉방기에도 비슷한 격자무늬 틀을 덮어뒀는데 이는 궁궐 담장 무늬와 같다. 공간의 요소가 안과 밖을 연결하니 13.2㎡ 남짓한 면적이 충분히 넓게 느껴진다. 격자무늬 벽은 수납장 역할을 대신한다. 격자 너비와 높이가 카페에 필요한 도구를 딱 알맞게 둘 수 있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의 요소는 정중하고 고요하며 아름답다.
TXT 카페 격자무늬 벽은 수납장으로도 쓰인다. 한옥의 정취가 묻어난다.
TXT 카페 격자무늬 벽은 수납장으로도 쓰인다. 한옥의 정취가 묻어난다.
커피는 본래 자연의 것을 빌려 맛과 향을 완성하는 게 아닌가. 이 공간은 커피의 그것과 닮았다. 담장 너머 궁궐 한옥은 겉으로는 우람해 보이지만 추녀와 공포로 꾸며져 있어 생각보다 실내가 넉넉하지 못하다. 그래서 기둥 없이 넓은 공간을 그대로 활용하는 현대 건축물과 달리 실내를 꾸미는 일에 제약이 있는 곳이 많다. 하지만 한옥은 무작정 공간을 넓히기보다 주변 환경과의 어우러짐을 선택한다. 들어열개문(사분합문)과 미닫이문으로 계절에 따라 공간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렇다. 한옥의 문과 창문은 사람이 들고 나는 공간이자 집과 자연이 공존하는 통로로 존재했다. 바람과 햇살,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이 바람을 타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니 더 넓고 높게 건물을 짓는 일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치를 빌려온다는 뜻의 ‘차경’은 한옥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TXT도 차경의 공간이자 차음의 공간이고 또 차미의 공간이 됐다.

이 대표는 이왕 빌려오는 자연의 맛이라면 가장 최상의 것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가꿔낸 커피 맛을 정중하게 설명하고 추출하는 일은 그가 생각하는 공간의 완성이기도 했다. TXT에선 정갈하게 갈아둔 연필로 주문서를 쓴다. 주문서에는 그날 준비된 커피가 나열돼 있거나 몇 가지 키워드로 자신이 원하는 커피를 찾을 수 있는 질문을 적어놓았다. 대체로 주문서를 작성한 끝에는 취향에 관한 깊은 대화가 이어지곤 한다. 주문이 완성되면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주전자를 들고 커피를 내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좋아 골랐다는 도기 드리퍼와 서버 소리가 마지막으로 공간을 채운다. 문을 열 때 받은 정중한 인사는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켤 때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