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는 끝나지 않았다"…미디어아트로 부활한 20세기 아시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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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격동 아트선재센터,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아시아 근현대사를 미디어아트로 재조명
과거와 미래를 잇는 빅데이터와 예술의 융합
아시아 근현대사를 미디어아트로 재조명
과거와 미래를 잇는 빅데이터와 예술의 융합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지식의 보고(寶庫)인 백과사전이 그랬다. 현대 백과사전의 시초격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19세기 제국주의의 팽창과 맞물려 발전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일까. 서구는 만물의 정보에 알파벳 순서로 이름표를 붙이며 '지식 패권'마저 거머쥐었다.

호추니엔, 그는 누구인가
호추니엔은 지난 20여년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앞장서 왔다. 1976년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았지만, 유독 과거사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적은 모국(母國)의 행태에 의문을 품었다고. 그때부터 미디어아트 작가와 영화감독을 오가며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대표작은 2012~2017년 작업한 '동남아시아 비평 사전' 시리즈다. 서구의 시각에서 획일적으로 다뤄온 아시아 역사의 다채로운 면면을 조명한 미디어 백과사전이다. 동남아 지역사를 대표하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이와 관련해 수집한 사진과 영상자료를 재편집했다. '에이전트(Agent)의 A', '스파이(Spy)의 S', 싱가푸라 왕국을 세운 '우타마(Utama) 왕의 U' 등을 다뤘다.

아시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3층에는 영상 설치 신작인 '시간의 T'와 '타임피스'(2023~2024)가 걸렸다. '시간의 T'는 시간과 관련된 42개 챕터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3·1운동 때 거리를 행진한 한국인, 일본 도요타 공장의 조립라인, 동남아 전통 악기를 촬영한 영상 자료 등이 알고리즘에 의해 변칙적으로 상영된다. 각 영상의 주요 장면을 캡처해 43개 화면에 따로 전시한 작품이 '타임피스'다.
한국 관람객이라면 태평양전쟁 시기를 다룬 2층의 '호텔 아포리아'(2019)에 눈길이 갈 수 있겠다. 지난 2019년 일본 최대의 국제예술제인 아이치트리엔날레에 선보이기 위해 제작된 설치작업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중도 중지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행사다. 작품 제목의 '아포리아'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의미한다.

호텔 아포리아는 '파도' '바람' '보이드' '어린이'란 소제목으로 구성된 6채널 영상작업과 거대한 팬으로 구성됐다. 일본 전통 다다미방처럼 꾸며진 곳에 류이치 요코야마의 선전 만화영화 '잠수함의 후쿠짱'(1944)과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1949)이 상영된다. 제국주의 세력에 봉사한 요코야마와 그러지 않았던 야스지로를 나란히 세우며 과거를 돌아보게끔 연출한 구성이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엔 황량한 들판이 남았다. 전시장 한편에 바람을 일으키는 거대한 팬이 배치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전쟁과 군국주의의 허무함을 상징하는 장치의 이름은 '보이드(Void·공허)'.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윙윙거리는 소리는 전투기 프로펠러가 언제든 재가동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음으로도 들린다.

'굴드'(2009~2013)와 '뉴턴'(2009)에는 공통으로 백색증(白色症)을 앓는 아시아인이 등장한다. 백색증은 피부와 머리카락에서 멜라닌 색소가 합성되지 않아 하얗게 발현하는 증상이다. '굴드'의 피아니스트, '뉴턴'의 만유인력은 각각 서구의 예술과 과학의 결정체로, 작가는 이를 통해 백색주의에 물든 아시아의 현실을 풍자했다.

아시아를 단순히 역사의 피해자로만 묘사한 전시는 아니다. 전시 제목의 '클라우드(Cloud·구름)'가 힌트다. 클라우드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장막이자 구름에서 비치는 한 줄기 빛, 그리고 호추니엔이 구축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두루 상징하는 단어다. 전시는 8월 4일까지.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