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천민 민주주의의 시대
‘대북송금 검찰조작 특검법’을 제출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지켜보는 마음은 당혹스럽다. 얼마 전까지 정의를 혼자 세울 것처럼 목소리 높이던 검찰 고위직 출신들이 제22대 국회 문을 열자마자 ‘정치검찰’의 조작사건이라며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생경제의 어려움이 심화하고 첨단산업의 경쟁력이 하락하는 등 국가 미래를 위협하는 시급한 난제가 산적한데 특검법과 상임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는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당은 도당(徒黨)으로 전락해 당내 민주화는 온데간데없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공정하게 반영해야 할 공천은 연줄과 보상을 위한 사천으로 변질됐고 특정 권력자를 위한 사당화 경쟁에 여야가 따로 없다.

주말마다 광화문 거리를 점령한 보수·진보 시위대는 난장판의 국가스포츠가 된 지 오래고 극단적 정치 팬덤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정치판이 연예계 아이돌 경쟁처럼 변했고 성실한 의정활동과 입법 역량보다 인사 잘하는 후보에게 표를 주는 낮은 민도는 어지럽게 나붙은 정치 현수막처럼 타락했다. 복지국가를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똑같은 혜택과 의무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돼야 하는데 세금 낼 생각은 하지 않고 국가가 모든 것을 해주기만 바라는 공짜심리가 만연해 있다. 공해 수준의 방송과 유튜브가 넘쳐나는 정치 과잉의 사회가 됐지만 수준 높은 정책토론은 실종됐다. 국가재정을 무시한 묻지 마 포퓰리즘에 열광하고 미래세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장 내 이익만 챙기겠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지역주의는 중병 수준인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민주주의는 자기결정(自己決定)과 자기지배(自己支配)의 결과로 나타나는 통치 형태이다. 정치적 지배질서의 구속을 받는 자는 동시에 지배질서의 형성자이며 그런 차원에서 민주주의는 자유와 지배의 조화를 의미한다. 자유에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가 따른다. 자유라는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행동과 책임의 균형을 추구하는 사회가 돼야 하고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대장동 변호사’ 출신인 김동아 민주당 의원의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 발언이 위험한 것은 선출된 권력이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다수의 폭정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이고 신중해야 할 특검법의 남발도 헌법에 규정된 검찰과 사법제도라는 게임의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 시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

이기심에만 집착해 공정한 자유경쟁과 직업윤리를 상실한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 한다면 선출된 권력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폭정을 일삼고 국가구성원들이 책임과 의무를 망각한 민주주의는 천민민주주의가 아닐까. 정치는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지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국가 간의 경쟁은 항상 상대적 국력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데 타락한 정치가 국가 발전과 미래의 발목을 잡는다면 민주와 정의를 아무리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소모적 정쟁에 빠져 있는 정치권은 주자성리학의 폐쇄적 질서 속에 도덕을 무기 삼아 당쟁만 일삼다가 몰락한 조선으로 회귀한 듯하다. 민주정치와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중우정치는 동전의 앞뒷면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꽃피웠지만 무책임한 선동가들의 목소리에 일관된 장기 국가전략을 잃어버린 아테네가 페리클레스 사후 25년 만에 몰락한 역사적 교훈은 남의 일이 아니다.

국가의 역할은 비약하려는 개인과 기업이 능력을 모두 펼칠 수 있도록 단단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피나는 노력과 노고 없이 번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강대국이 되기보다 성공한 나라가 돼 국민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해줘야 한다. 성공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제도가 완비돼야 할 뿐만 아니라 합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국민들이 수준 높은 지식과 문화를 갖춰야 한다.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국민 각자가 참여해 망국적 정쟁만 일삼는 선출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3류 정치권력으로부터 대한민국 공동체를 지켜내려면 “스스로를 지키려 하지 않는 자, 그 누가 도우려 하겠는가”라고 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말부터 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