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옹원
사진=사옹원
‘K푸드’란 단어도 없던 시절.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한식에 관심을 가진 건 1988년 서울올림픽 때다.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하고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한식을 외신이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식의 글로벌화가 태동기에 접어든 이 시기, 식품 유통사 직원으로 일하던 30대 초반의 한 청년은 한식 수출의 가능성을 목격했다. 당시 서울올림픽 선수촌과 훼밀리타운에 수산물을 납품하던 그는 외국인들이 전, 잡채 등 한식을 즐겨 먹는 모습을 보며 냉동 한식을 사업 아이템으로 떠올렸다. 이후 7년간 시장조사를 한 뒤 1995년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조선시대 궁중 음식을 관할하던 관청 이름을 따 사옹원으로 지었다. 이상규 사옹원 대표(70)의 창업 스토리다. 이 회사는 전통 가정식인 전, 부침 등을 대량 생산해 전 세계 20여 개국에 수출한다.

차별화 제품 위해 설비 직접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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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창업 초기부터 ‘남들이 만들지 않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경영철학을 세웠다. 이제 막 시작하는 중소기업이 성공하려면 기존 대기업이 판매하지 않는 제품을 내놔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가장 일반적인 냉동식품인 만두, 돈가스, 치킨을 판매하지 않는 이유다.

이 대표의 전략은 국내 시장에서 적중했다. 창업 이듬해인 1996년 초·중·고교 급식업체들이 사옹원의 산적을 대량 구매하기 시작했다. 사옹원 제품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급식업체는 산적을 급식 메뉴에 올린 적이 없다. 이후 사옹원은 국내 주요 대기업 구내식당으로 납품처를 확장하며 사세를 넓혔다.

발주량이 많아진 건 회사에 기회이자 위기였다. 설비 자동화 없이 내부 인력으로 물량을 납기 내 채우는 게 버거운 상황에 봉착했다. 이 대표는 주요 설비 업체를 방문하며 사옹원 메뉴에 맞는 설비 제작을 요청했지만 매번 문전박대당했다. 다른 식품사에서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지 않아 사옹원만을 위한 설비를 설계하는 건 수익성이 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대표는 2011년 유럽의 크레이프 조리 설비를 들여와 한식에 맞게 개조했다. 그는 “다른 식품사가 생산하지 않는 제품을 제작하다 보니 설비 설계도 독자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며 “중소기업 중에서 자체적으로 설비를 만들고 내부에 엔지니어링 조직을 운영하는 곳은 우리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 물꼬 튼 2세 경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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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있는 메뉴와 설비를 내세워 국내에선 빠르게 사세를 확장했지만 이 대표의 처음 목표인 ‘한식의 글로벌화’는 쉽지 않았다. 외국어를 못하는 게 큰 장벽이었다. 식품 박람회에서 외국 바이어가 사옹원 부스를 방문하면 보디랭귀지를 활용하거나 옆 부스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일쑤였다.

사옹원 해외 판로 확대에 물꼬를 튼 건 2세 경영인 이지인 부사장이다. 일본어, 영어에 능통한 이 부사장은 2011년 해외영업팀장으로 회사에 합류해 외국인 바이어와 직접 소통했다. 이 부사장 합류 이후 사옹원 수출액은 2011년 10억원에서 지난해 170억원으로 불어났다. 2019년엔 500만불 수출의 탑, 2020년엔 1000만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이 부사장이 집중 공략한 채널은 ‘수출의 관문’으로 꼽히는 트레이더조스다. 미국 식료품점 체인인 이곳은 일부 품목만 엄선해 유독 신규 입점이 어려운 유통채널로 꼽힌다. 입점 진입장벽이 높아 한 번 입점에 성공하면 다른 업체들도 해당 회사 제품의 품질을 신뢰하는 게 일반적이다.

현지화 전략으로 美·中 개척

이 부사장은 트레이더조스 입점을 위해 2013년 사옹원 최초로 현지 맞춤형 제품을 개발했다. 트레이더조스 입점을 담당하는 한국 벤더로부터 ‘미국 현지에서는 야채전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는 ‘김치나 해물이 안 들어간 밋밋한 야채전이 인기가 있겠느냐’는 의견이 많았지만 초도물량 10만 봉이 한 달 만에 동났다. 지금은 1년에 300만 봉씩 팔리는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 부사장은 “야채전은 한국에는 없는 메뉴”라며 “현지 맞춤형 제품으로 성공한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코스트코 입점 역시 사옹원의 해외 진출을 가속화했다. 2017년 한국 코스트코 입점 이후 대만(2019년 8월), 중국(2019년 10월) 등 해외 코스트코에 잇달아 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 부사장은 내년 회사 설립 30주년을 맞아 대표직에 취임한다. 취임 이후에는 ‘더욱 글로벌화된 사옹원’을 이루는 게 이 부사장의 목표다. 그는 “해외 영업조직을 확대하고 미주, 유럽, 아시아 등 지역별 전문가를 양성해 수출을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음성=이미경 기자 capit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