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댄 플래빈 회고전
1960년대 형광등으로 독보적 예술 세계 구축
팝아트와 미니멀 아트의 천재적 결합
"이것은 조각도 회화도 아닌, 상황의 예술이다"
공간을 캔버스 삼아 몽환적 즉각적 무드 연출
1954년 한국 파병 당시 처음 미술 공부
뉴욕 돌아가 미술사와 회화 배워 27세에 데뷔
193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태양처럼 빛나는 2500개의 불빛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 빛나던 태양들은 형광등.
인류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형광체'를 발견한 게 1674년이었으니, 형광등이 대량생산 된 건 무려 26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이 주도한 형광등의 대중화는 세계인의 삶을 바꿨다. 캄캄한 밤에도, 어스름한 새벽에도 대낮처럼 일할 수 있게 됐다. 어쩌면 형광등의 발명은 산업혁명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다.
미국 미니멀리스트 작가 댄 플래빈 대규모 전시 '빛에 대한 헌사'. 이른바 '캔디 컬러'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지금이야 현란한 영상 기술을 접목한 미디어 아트가 일반화 됐지만, 당시엔 우리가 알던 형광등의 본질을 뒤엎는 장면이었다. 대량생산되는 인공의 재료로, 절제된 배경을 채운 그의 예술 세계는 그 시기 유행하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을 결합한 '천재적 융합'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미니멀리스트 작가 댄 플래빈 대규모 전시 '빛에 대한 헌사'. 전시 공간들을 홀리듯 따라가고 있을 즈음, 예술가로서의 플래빈을 환기할 수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형광등 작가'로만 알려졌던 그의 초기 초상화와 풍경화, 스케치와 다이어그램 등의 드로잉 작품과 노트를 보고 있으면 전통의 재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한 사람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어떤 변화와 혁신을 꿈꿨는 지 알 수 있다. 언젠가 꺼져버릴 유한한 재료 형광등으로, 영원불멸할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고뇌가 담긴다.
미국 미니멀리스트 작가 댄 플래빈 대규모 전시 '빛에 대한 헌사'를 기념한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아트숍. (c) Bora Kim 뉴욕 태생의 플래빈은 미술 작업과 미술사 공부를 병행한 지적이고 감성적인 예술가였다. 27세가 되던 때 맨해튼 허드슨강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했는데, 이 무렵 그의 노트에는 전기 조명을 활용한 작품 구상으로 가득 차있다. 튜브 안에 갇힌 빛들이 뿜어내는 색의 형상들은 공간을 비추면서 채우도록 정교하게 설계된다.
KunstMuseum Basel에서 열린 댄 플래빈 대규모 전시 '빛에 대한 헌사(Dedication in Lights)'
KunstMuseum Basel에서 열린 댄 플래빈 대규모 전시 '빛에 대한 헌사(Dedication in Lights)'에서 공개된 드로잉. 그에게 형광등은 빛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모서리와 벽면에 형광등을 배치하면서 제목을 '무제'로 하거나 그의 친구 이름(재스퍼 존스, 솔 르윗, 도널드 저드)을 집어넣었다. 때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노골적 반대를 표현한 '매복 중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4-나에게 죽음을 상기시켜준 P.K.에게-같은 제목도 남겼다. 아름답고 서정적이기만한 시각적 환희에 상반되는 타이틀을 부여한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빛은 그 자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명확하다. 빛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전달된다." 바젤=김보라 기자
세르반테스가 1605년에 출판한 소설 <돈 키호테> 만큼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던 작품도 드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키호테’는 청각의 영역만으로 시각적 효과를 동반한 그 어떤 작품보다도 입체적이며 풍부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걸작이다.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6월 정기연주회에서는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극치과 절정의 황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날 공연은 월간 <아르떼> 매거진의 창간을 기념하는 자리로 300명 이상의 정기구독자가 참석했다고 한다. 아르떼필의 ‘돈 키호테’에서 서주의 떠들썩하면서 혼란스러운 소란스러움은 에피타이저였다. 세번째 변주에서 돈 키호테와 산초의 대화가 무르익으면서 오케스트라가 자아내는 극적인 분위기의 고양은 일품이었다. 첼리스트의 격렬한 연주가 리드하며, 국내 오케스트라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한 첼로와 더블 베이스의 저음 연주를 만끽할 수 있던 장면은 콘서트 고어로서 흐뭇했다. 다만 프레이징의 묘미를 좀더 살리면서 장면 장면을 좀더 음미하며 리드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았다. 작품은 치밀한 앙상블만이 열 수 있는 관현악의 비경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일원에게 저마다 솔리스트로서의 역량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클라리넷, 트럼펫, 호른, 팀파니 수석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 이날 연주회의 가장 두드러진 수훈갑을 꼽으라면 역시 ‘돈 키호테’로 분한 첼리스트 심준호다. 시종 캐릭터에 완전히 빠져든 연주였다. 좌충우돌하는 인물을 이렇게 격렬하게 그려낸 연주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압도하며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 일성부터 굳건한 보잉으로 모험을 떠나는 비장한 무드를 완벽하게 조성했다. 앞서 언급한 저음현을 이끌던 장면은 격렬한 연주로 전장에 나선 결연함을 보이며, 섬세한 프레이징의 묘미로 비르투오지티를 마구 뿜어냈다. 결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죽음을 앞둔 장면까지 이어지는 장면은 너무나 뭉클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마저 무척 예술적이었다. ‘산초 판자’로 분한 비올리스트 김상진의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연주는 음향적으로나 캐릭터상 차별되며 극의 전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부에서 브루흐가 만년에 천착했던 비올라를 연주하여 ‘로망스’를 들려주었다. 또렷하지만 오케스트라와 조화가 훌륭하며 작품의 낭만성을 잘 살린 수연이었다. 이어서 심준호가 ‘콜 니드라이’를 연주했다. 거친 호흡과 간결한 프레이징 그리고 강한 비브라토로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작품이 통상적으로 주고 있는 ‘기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다채로운 음향의 매력과 함께 잘 짜여진 스토리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래밍, 흔히 듣기 힘든 관현악의 정점에 있는 명곡, 게다가 정상급 솔리스트의 협연. 이번 아르떼필의 정기연주회는 훌륭한 오케스트라 콘서트의 요소를 고루 맛본 보기 드문 기회였다.김준형 음악칼럼니스트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에 ‘문화대혁명’이란 광기가 휘몰아쳤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등을 돌렸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난했다. 200만명이 정치적인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수천만명이 투옥됐다. 현재 중국에선 이 잔혹하고 끔찍한 시기의 기억이 빈 공간처럼 남아 있다. 중국 정부의 탄압과 당사자의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겹쳐져 ‘국가적 기억 상실’을 초래한 것이다. <기억의 장례>는 그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책을 쓴 타냐 브레니건은 영국 가디언지 기자다. 2008~2015년 중국 특파원을 지내며 그는 깨달았다. 문화대혁명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중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집단적 트라우마라는 것을. 그는 문화대혁명에 가담하고, 겪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책은 문화대혁명이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기억되고, 잊혀지고, 재해석되고 있는지 탐구한다. 1970년 팡중모우는 남편이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저녁 팡중모우는 빨래를 하다 마오쩌둥을 비난했다. 그걸 듣고 10대 아들인 장훙빈이 경고했다. “당신이 친애하는 마오 주석에 반대한다면 나는 개 같은 머리를 부숴버릴 거야.” 남편도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은 반혁명분자의 입장을 고집하는 당신과 관계를 끊는다. 당신은 적이고, 우리는 당신에게 맞서 투쟁할 것이다.”팡중모우는 고집을 꺽지 않았고, 남편과 아들에게 고발당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처형당했다. 저자에게 장훙빈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가 어머니에게 한 짓은 짐승보다 못했어요.” 같이 어머니 무덤에 가서는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불효자가 왔어요! 어머니!”중국인들이 과거를 속죄하는 것만은 아니다. 시진핑 시대 들어 문화대혁명에 대해 말하기란 더 어려워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보다 중국 정부의 통제는 더 강해졌고,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인터넷에 개설된 문화대혁명 추모 사이트도 폐쇄됐다. 저자는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 과거가 묻히고, 착취되고, 다시 그려지면 현재는 어떻게 될까. 이어 중국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고 말한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김훈, '늙기의 즐거움')단문과 미문의 대가로 꼽히는 소설가 김훈(76)이 산문집 <허송세월>을 냈다. 어느덧 여든에 가까워진 작가는 생과 사의 경계를 헤매고 돌아온 경험담부터 투병생활, 주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허송세월'을 담아 쓴 45편의 글을 모았다.이번 산문집엔 늙음과 죽음을 바라보는 노(老)작가의 통찰이 돋보인다. 형뻘 되는 벗의 화장장에 다녀온 후 쓴 '재의 가벼움'에서 김훈은 당시의 단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중략)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재의 가벼움')그는 화장장의 뼛가루를 바라보며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며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한다.심혈관계통의 질환으로 크게 앓았다는 김훈은 말 그대로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것인지 자조한다. 그리고 뼛가루로 사그라들기 전 어떤 유언을 남길 것인지 고심한다. 그러면서도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햇빛을 쐬며 삶의 생명을 노래한다.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 수 있고, 한 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허송세월')시대의 문장가로서 그에게 평생의 과제였던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내놓는다. '조사 '에'를 읽는다'에선 문장의 논리적 기둥을 이루면서도 문장 안에 자유의 공간을 유지하는 '에'의 역할을 조명한다. 김훈은 '덜어내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중요성도 강조한다."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고, 등장인물의 말투가 들뜨고 단정적 종결어미가 글 쓰는 자를 제압하려고 덤벼든다."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책은 늙어 가는 일의 즐거움을 논하는 글로 운을 떼어, 도로변 투명 벽에 부딪쳐 죽는 새들과 철모를 남기고 간 옛 병사를 향한 헌사로 닫는다. 원로 작가의 개인적인 일상과 상념이 그의 명료하고 섬세한 문체로 생명력을 얻어 마음에 파고든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