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격변하고 있다. 더는 미국과 유럽만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다극화 세계에서 중국과 인도는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권력은 지금도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과 세계 질서의 변화는 미국뿐 아니라 미국과 우방 관계에 있던 서방세계에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권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새로운 질서 체제에서 누가 우방이고 누가 적인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이제 새로운 질서 체제에서 각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영리하면서도 현명한 판단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교도와 기독교인, 야만인과 문명인,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슬람과 서구 기독교 문화 등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라는 한 집단과 그 대척점에 ‘적’이라는 또 다른 집단이 존재했다. 종교나 이념 또는 체제를 가지고 대결하면서, 서로 간에 세력을 결집하고 확장했다. 약자는 패권 국가의 설계에 따른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최근 세계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갈등 구도 속에서 대립하고 있다. 우익 포퓰리스트의 등장과 극단주의의 득세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고, 세계는 또다시 분열되고 있다. 도대체 누가 계속 이런 ‘대결 구도의 내러티브’를 만들고 있는 걸까? 대결 구도의 배후에는 어떤 이해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이런 갈등과 대립을 통해 누가 결국 이득을 볼까? 최근 독일에서 출간돼 화제인 책 <관용의 세기(Das Jahrhundert der Toleranz)>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코로나 팬데믹 시대 시민의 의무’, ‘노동 시장의 변화에 따른 일의 의미’, ‘인공지능 시대 인간 존재의 이유’ 등 출간하는 책마다 시의적절한 주제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을 표방해온 ‘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Richard David Precht)가 <관용의 세기>를 통해 세계 질서 재편에 따른 생존 전략을 소개한다.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해 이념 대결과 체제 경쟁을 끝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한다.하나의 거대한 배 안에 타고 있는 인류는 지금 지구생명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생태적 재앙 앞에 놓여 있다. 생각의 차이를 이유로 서로 나뉘어 갈등하고 대결할 수 있는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책은 국가와 문화를 편 가르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닌, 인류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이 강력한 구심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다.“21세기에는 전통적인 우방과 적의 대결 구도를 버리고, 다양한 문화와 발전 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전하면서, 분열을 조장하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모든 국가와 문화가 공유하는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면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책은 모든 국가와 문화가 공유하면서 인류를 하나로 묶어줄 강력한 구심점이 ‘인권’이라고 소개한다. 나와 다른 타인을 대할 때 ‘관용’, ‘다양성’, ‘개방성’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이 인권이다. 불행한 과거의 망령, 대결의 정치적 유산, 광신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공존을 시작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스스로 인류 문명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관용의 세기’로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
수학자에게 배우는 ‘중립 놀이’수학자는 증명하는 사람이다. 대단한 수학자이든 ‘덜’이 붙은 쪽이든 추상의 극치인 수학 이론에는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한다. 허투루 아무 가설에나 호기롭게 베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학자들은 자기 자신과 미리 싸운다. 말 그대로다. 어떤 이론을 증명하려 한다면, 낮에는 그것을 증명하려 애쓰고 밤에는 반증하려 애쓴다. 요즘 말로, “중립 기어” 제대로다.왜 어긋나는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라는 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당신이 결국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명제가 실제로 거짓이라면, 당신의 노력은 모조리 헛수고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더 심오한 이유가 있다. 만일 어떤 명제가 실제로 참인데 당신이 그것을 반증하려고 애쓴다면, 당신은 결국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실패를 나쁜 것으로 여기도록 배웠지만, 모든 실패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패에서 배울 수 있다. <틀리지 않는 법> 중에서 수학자처럼 별나게 진실 찾기수학자 엘렌버그가 주장하는 역설로써 진실 찾기는 두 권의 픽션을 인용하며 계속된다. 이 두 픽션은 거짓말 조금 보태 모든 영미권 논픽션에서 인용되는 픽션이 되겠다. 사실보다 더욱 사실 같은 가짜, 진실에 가까운 허구라는 걸까? 그중 하나가 SF 드라마 <스타 트렉>이다.<스타 트렉>의 제임스 커크 (우주 함대) 선장이 독재적인 인공지능들을 무력화시키는 원리가 '역설'이다. 선장은 그들에게 역설을 입력함으로써 그들의 추론 모듈이 기진맥진하다가 멎어버리게 만든다. (...) 하지만 커크 선장의 수법은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수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조차. 인간은 모순을 어느 정도까지는 견딘다. <틀리지 않는 법> 중에서예민한 수학자들은 일반적인 말에서도 모순을 찾아내는데, AI는 한술 더 뜬다는 얘기다. 생성형 AI에게 “문 닫고 들어와.”라고 물어봤더니, “닫힌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행위는 위험합니다”라고 답한다. 별나긴 한데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다.이 책에 인용된 또 다른 ‘베스트 인용 도서상’은 저자의 이름을 대는 게 낫다. 수많은 저자들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소설 <시스템의 빗자루>를 언급하는 듯하다.월리스는 수학자의 방식으로 역설들과 씨름했다. 일단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를 모두 믿자. 거기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한 발 한 발, 덤불을 쳐내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분리하며, 모순되는 두 가설을 마음속에 나란히 놓아 두고서 각각을 대립되는 상대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틀리지 않는 법> 중에서 아는 함수가 여럿일 때의 장점<틀리지 않는 법>의 저자는 십자드라이버 하나만으론 기계의 모든 나사를 풀 수 없지 않느냐, 여러 가지 수학적인 사고법을 활용해서 윤택한 삶을 살아보라 권한다. 이를테면 아는 함수가 여럿이면 사는 데 보탬이 된다. 다다익선이라는 선형 함수에서 벗어나 행복의 문제를 최적점이 있는 포물선 이차 함수로 생각한다면? 지지부진한 과정이 답답한 학습자라면, 어느 순간을 지나 급성장하는 지수함수를 떠올려보자. 저자의 말마따나 모든 기계를 십자드라이버로 분해하려고 나서면 나사를 망가뜨린다.그런데 말이다. 이 새 도구는 값싸지 않아서 얼마쯤 집중력이란 비용을 치러야 한다. 참신하지만 생소하다. 그럴 땐 이런 위로가 도움이 된다. 시집을 읽으며 전부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으스댈 사람은? 수학책과 과학책도 마찬가지다.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
국내 최대 규모의 책 축제 '2024 서울국제도서전'이 개막한 지난 26일. 도서전이 열리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 D홀 한가운데에 긴 줄이 늘어섰다. 도서전 메인 행사 중 하나인 김연수 소설가와 강혜숙 그림책 작가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다. 사전예약이 일찌감치 마감된 이 강연의 현장 좌석을 잡기 위해 수십명이 줄을 섰다. 이날 100여석 넘게 마련된 좌석이 모자라 일부는 일어서서 이야기를 들었다. 김 소설가는 "이렇게 줄이 길고 붐비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각자의 '후이늠'은 어디에이날 강연 주제는 '후이늠'. 올해 도서전의 주제기도 하다. 후이늠은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1726)에서 주인공 걸리버가 네 번째로 도착한 여행지. 1909년 육당 최남선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 책은 당시 전체 4부 중 소인국과 대인국이 나오는 1·2부만 소개됐다. 김 소설가는 최남선 번역본을 옛 한글의 입말을 살려 개정하고, 3·4부의 라퓨타(날아다니는 섬)와 후이늠 내용을 추가해 <걸리버 유람기>를 출간했다. 강 작가가 삽화를 그렸다. 후이늠은 지혜로운 말(馬)이 지배하는 나라다. 말은 인간과 달리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완벽한 이성으로 판단한다. 무지나 오만, 욕망, 비참, 전쟁과 갈등 등이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다. 김 소설가는 이날 강연에서 "후이늠은 우리가 지금 처한 모순적인 상황과 비이성적인 일들이 해결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며 "이 책을 통해 각자의 후이늠에 대해 생각해보고 토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각자 꿈꾸는 후이늠에 대해 이야기하는 북토크 프로그램 등도 다양하다. 28일 문우리 포티파이 대표와 황현정 샤크짐 공동대표, 황선우 작가, 황효진 뉴그라운드 대표 등은 여성의 시각에서 평화로운 일상, 후이늠을 다룬다. 김초엽 소설가와 심완선 공상과학(SF) 평론가는 30일 현실과 가상이 혼재하는 새로운 세계, 디지털 후이늠에 대해 이야기한다. 후이늠을 주제로 한 기획도서도 만들어졌다. 강화길·구병모·김혜순·박형준·안희연·이승우·임솔아·장강명·정호승·진은영·천운영·편혜영 등 7명의 소설가와 5명의 시인의 글을 모은 <후이늠-검은 인화지에 남긴 흰 그림자>다. '후이늠'을 키워드로 책 400권을 큐레이션해 소개도 한다. 낯설고도 가까운 '중동' 문학국제도서전인만큼 올해 도서전엔 총 19개국의 출판 관계사가 참여했다. 주빈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스포트라이트 컨트리'로 선정된 오만 등 일반 독자에게 낯선 중동 문학이 눈에 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타짐 이니셔티브 다라 재단과 국제 살만 아랍어 아카데미, 압둘아지즈 도서관 등의 책을 전시했다.사우디아라비아의 출판 문화를 알리는 다양한 강연도 이어졌다. 메샤엘 압둘라 알하르비 작가와 아비르 알알리 소설가·시인, 아시르 알나시미 소설가 등은 27일 '사우디아라비아 문학의 현주소'에 대해 강연했다. 압둘라 알라카이비 작가 겸 평론가는 오는 29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소설에 대해 세미나를 연다. 오만은 오는 29일 2019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을 수상한 자국의 작가 조카 알하르티와 국내 소설가 은희경의 북토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두 소설가는 해방과 인간의 존엄, 자유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부슈라 알와하이비 소설가 겸 시인과 모하메드 빈 칼판 알야하이, 자란 알카시미 소설가 겸 시인 등 오만 문학 전문가들은 오만 작가들의 생활사가 문학에서 어떤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나는지 살피는 북토크를 27일 열었다. 도서전 현장에선 오만의 유명 서예가 바르드 알 가피리가 방문객을 상대로 아랍 캘리그래피를 써주는 이벤트를 열어 긴 줄을 늘어뜨렸다.이밖에 노르웨이 생물학자 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 작가가 내한해 강연을 열고, 내년 도서전의 주빈국인 대만은 48개 출판사의 신간 및 수상도서 300여권을 전시했다. 독자 참여 '인터렉티브' 콘텐츠독자가 직접 참여하는 참여형·양방향 인터렉티브 콘텐츠도 많다. 문학동네는 전화부스를 마련해 전화로 시를 들을 수 있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민간이 운영하는 도서관 소전서림은 소설 <롤리타>와 <노인의 바다>의 문학 시험지를 푸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잡지사 엘르의 뉴스레터 '엘르보이스'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에세이 취향을 분석하고 에세이를 추천하는 프로그램을 열었다. 금융 플랫폼 토스는 책을 직접 제작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도서전에 참가한 한 출판사 관계자는 "아침부터 캐리어까지 끌고 와 열정적으로 둘러보는 관람객들을 보고 놀랐다"며 "책이 위기인 시대라고는 하지만 좋은 책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은 여전히 많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