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
김달진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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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 시인의 ‘샘물’을 다시 읽는 까닭 [고두현의 아침 시편]
새 시집이 좋은 인연을 만났습니다. 과분하게도 ‘김달진문학상’을 받게 됐습니다. 이 상은 시인이자 한학자인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1907~1989) 선생을 기려 1990년에 제정한 것으로 올해 35회째입니다. 수상자가 두 명인데, 김수복 한국시인협회장과 공동 수상하게 돼 더욱 영광입니다.

신문 발표를 보고 많은 분이 축하와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9년 만에 펴낸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2024.3)가 좋은 평가를 받아 기쁘지만, 상을 받을 때 두 손을 겸허히 모으는 것만큼이나 마음속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앞으로 더 깊이 생각하고 더 폭넓게 경험하고 더 겸손하게 공부하겠습니다.

시상식은 김달진문학제 기간인 10월 12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김달진문학관 생가에서 열립니다. 그에 앞서 오늘(14일) 저녁 6시 30분 고려대학교 100주년기념관에서 김달진문학상 기념 시낭독회가 펼쳐집니다. 초여름 밤, 시원한 바람과 싱그러운 시향(詩香)이 어우러진 곳에서 다시금 출발선에 선 ‘문청’의 자세를 되새기겠습니다.

수상 통보를 받고 이 시 「샘물」을 생각했습니다. 작은 샘물이 하늘과 바다로 무한히 넓어지는 풍경,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아 보는 시인의 모습….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은 이 장면을 이렇게 시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니! 숲속 샘물을 둥근 지구와 우주의 섬으로 치환하는 감각이 놀랍고도 경쾌합니다. 티끌과 우주, 찰나와 영겁의 합일이라고 할까요.

이 시가 동아일보에 실린 게 1938년이니 시인의 나이 31세였습니다. 아직 설익은 청년기의 감각이 이처럼 깊고 넓은 것은 남다른 수행을 통해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원리를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즉상입이란 삼라만상이 대립하지 않고 융합해 작용하며 무한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양자가 융합하고 일체가 되어 아무런 장애도 없는 경지이지요.

이 시와 함께 「화과원시(華果園詩)」도 떠올렸습니다. ‘하낫하낫 먼 하늘 끝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무거운 별을 바라보내는 애급(埃及)/ 오천년(五千年)의 스핑스의 찬 마음// 창밖에는 빗소리 들리고/ 벽상의 시계(時計)도 없는 여기는 깊은 산(山)이다.’(부분)

이 시의 시간은 밤이고 공간은 산입니다. 하늘 끝으로 떨어지는 ‘무거운 별’에서 먼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오천년 된 스핑크스의 ‘찬 마음’을 감지하는 광대무변의 경지에 탄복이 절로 나옵니다. 이 시를 28세 때 발표했으니 더 놀랍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상즉상입의 문을 그는 경남 함양 화과원에서 선농(禪農)을 병행하며 ‘인과상즉무애(因果相卽無碍)’를 체득한 20대에 이미 열었습니다.

저도 시인의 뒤를 따라 숲속 작은 샘물을 오래 들여다보겠습니다. 물속의 하늘과 바다를 보듬고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아 보겠습니다. 한밤 깊은 산에서 지구 저편의 ‘찬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자세도 함께 배우겠습니다. 상즉상입의 한 쪽문을 넌지시 열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생각을 수상 소감에 담았습니다. 소감문에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쪽문에 기대어’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보니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이제 겨우 ‘쪽문’ 앞에 섰습니다. 그 문틈에 기대어 내밀한 세계의 안쪽을 살짝 엿보는 정도의 초심자라는 점을 잊지 않고 찬찬히 오래도록 정진하겠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