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견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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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어찌 살아야 하나'
이 질문 자체에 답이 있는지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것이
우울과 고난에 대한 해법
해결사 '시간의 힘'을 믿고
혼돈과 타락에 맞서 나가야
이응준 시인·소설가
이 질문 자체에 답이 있는지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것이
우울과 고난에 대한 해법
해결사 '시간의 힘'을 믿고
혼돈과 타락에 맞서 나가야
이응준 시인·소설가
1995년 4월 25일 초판 발행된 민음사판 밀란 쿤데라의 <느림> 뒤표지 날개에는 이 소설에 대한 르몽드의 서평 일부가 실려 있다. 내용은 이렇다. ‘옛날 중국에 추앙추라는 신묘한 화가가 있었다. 그에게 황제가 게 하나를 그려달라고 했다. 추앙추는 열두 명의 시종과 집 한 채와 5년의 시간을 요구했고, 황제는 이를 들어주었다. 5년이 지났다. 하지만 추앙추는 아직 그림은 시작도 안 한 채 5년의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황제는 수락했다. 10년이 거의 다 된 어느 날, 추앙추는 붓을 먹물에 찍어 순식간에, 단 하나의 선으로, 가장 완벽한 게를 완성했다. 자, 그렇다면 이 얘기는 느림을 칭찬한 것인가, 빠름을 칭찬한 것인가?’
1995년 무렵 두 가지 개념이 유행했더랬다. 정치적으로는 ‘환멸’이 그 하나요 실존적으로는 ‘느림’이었다. 동독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사실은, 자유화와 개방)과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은 한국 운동권 ‘세대’의 지식인(?)들이 더 이상 비장한 제스처를 부리기에는 민망한 공허를 조성했다. 또한 한국 후기산업화의 격랑은 한국 산업화의 과속 못지않게 몰아치고 설상가상 세기말적 분위기까지 흘레붙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됐을 때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총체적 날림’, 즉 ‘빠름’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대중에게는 어려운 관념적 주제를 다루는 쿤데라의 소설들이 당시 각광받은 까닭에는 그것들이 마치 노자(老子) 같은 뉘앙스로 읽힌 측면이 없지 않다.
최근 누가 내게 ‘요즘(이 시대)’을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만 홀로 있자니 그 우울한 질문이 절망을 고백하는 심정처럼 잊히지 않는 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묻고 싶어서였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 우울증에 대한 회고>는 자신이 앓았던 끔찍한 우울증과의 싸움에 대해 그가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자살’이 중요한 철학적, 문학적 테마였던 알베르 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스타이런은 카뮈를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미식가이자 호색가였던 로맹 가리가 극단적 선택을 했을 적에 그 부조리는 스타이런을 뒤흔들었다. 그는 시인 예세닌의 자살을 맹비난했던 시인 마야콥스키가 자살한 것도 언급한다. 예민한 예술가였던 것은 맞지만, 그들 삶의 근본이 보통사람들과 달랐던 게 아님은 보통사람들의 우울증과 자살 비율을 보면 안다. 특정한 뇌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원인이 모호한 경우가 많으며 양상도 천차만별이다. 치료법들이 완전한 해결을 담보 못하고 백신도 없다.
우울증이 ‘블랙홀 같은 미로’인 까닭은 인간 존재가 원래 그러하기 때문인데, 그건 ‘인간이 만든 세상’도 마찬가지다. 한데 스타이런의 우울증 탈출 비법은 좀 ‘허탈한 진실’에 가깝다.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그라진다는 것이다, 폭풍우가 그렇듯 우울증도. 생전에 아버지가 내게 남긴 말씀이 생각난다. “모든 문제를 네가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의외로 사람이 해결하는 일은 별로 없고, 대부분 시간이 해결한다.”
팬데믹 시기, 카뮈의 <페스트>가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사람들이 페스트 재앙을 코로나 환란의 은유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페스트>의 결말에서 페스트는 ‘저절로’ 사라진다. 인간들은 ‘사투를 벌이며 버텼을 뿐’ 그로 인해 페스트가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대신 그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깨닫고 배운다. 그리고 언젠가 페스트는 인간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러 다시 찾아올 거라고 카뮈는 속삭인다. 이런 스토리가 ‘역사(history)’다. 강물에 몸을 맡기듯 혼돈에 희망을 맡겨야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 한국의 지식인들은 무지했고, 지금은 타락했다. 그 무지와 타락이 ‘내로남불적 낭만주의’와 결합해 세대가 되고 대중이 되었다. 이념에 경도된 게 아니다. 시대에 염색된 것이다. 그 대가로 한국사회는 판단시스템이 붕괴됐다. 여전한 환멸이 아무리 우리를 괴롭힌들 예전 그 ‘느림’의 자리에 ‘견딤’을 두어야 한다. ‘시간의 힘’을 믿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이건 견딤을 말하는 것인가, 극복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1995년 무렵 두 가지 개념이 유행했더랬다. 정치적으로는 ‘환멸’이 그 하나요 실존적으로는 ‘느림’이었다. 동독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사실은, 자유화와 개방)과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은 한국 운동권 ‘세대’의 지식인(?)들이 더 이상 비장한 제스처를 부리기에는 민망한 공허를 조성했다. 또한 한국 후기산업화의 격랑은 한국 산업화의 과속 못지않게 몰아치고 설상가상 세기말적 분위기까지 흘레붙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됐을 때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총체적 날림’, 즉 ‘빠름’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대중에게는 어려운 관념적 주제를 다루는 쿤데라의 소설들이 당시 각광받은 까닭에는 그것들이 마치 노자(老子) 같은 뉘앙스로 읽힌 측면이 없지 않다.
최근 누가 내게 ‘요즘(이 시대)’을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만 홀로 있자니 그 우울한 질문이 절망을 고백하는 심정처럼 잊히지 않는 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묻고 싶어서였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 우울증에 대한 회고>는 자신이 앓았던 끔찍한 우울증과의 싸움에 대해 그가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자살’이 중요한 철학적, 문학적 테마였던 알베르 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스타이런은 카뮈를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미식가이자 호색가였던 로맹 가리가 극단적 선택을 했을 적에 그 부조리는 스타이런을 뒤흔들었다. 그는 시인 예세닌의 자살을 맹비난했던 시인 마야콥스키가 자살한 것도 언급한다. 예민한 예술가였던 것은 맞지만, 그들 삶의 근본이 보통사람들과 달랐던 게 아님은 보통사람들의 우울증과 자살 비율을 보면 안다. 특정한 뇌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원인이 모호한 경우가 많으며 양상도 천차만별이다. 치료법들이 완전한 해결을 담보 못하고 백신도 없다.
우울증이 ‘블랙홀 같은 미로’인 까닭은 인간 존재가 원래 그러하기 때문인데, 그건 ‘인간이 만든 세상’도 마찬가지다. 한데 스타이런의 우울증 탈출 비법은 좀 ‘허탈한 진실’에 가깝다.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그라진다는 것이다, 폭풍우가 그렇듯 우울증도. 생전에 아버지가 내게 남긴 말씀이 생각난다. “모든 문제를 네가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의외로 사람이 해결하는 일은 별로 없고, 대부분 시간이 해결한다.”
팬데믹 시기, 카뮈의 <페스트>가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사람들이 페스트 재앙을 코로나 환란의 은유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페스트>의 결말에서 페스트는 ‘저절로’ 사라진다. 인간들은 ‘사투를 벌이며 버텼을 뿐’ 그로 인해 페스트가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대신 그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깨닫고 배운다. 그리고 언젠가 페스트는 인간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러 다시 찾아올 거라고 카뮈는 속삭인다. 이런 스토리가 ‘역사(history)’다. 강물에 몸을 맡기듯 혼돈에 희망을 맡겨야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 한국의 지식인들은 무지했고, 지금은 타락했다. 그 무지와 타락이 ‘내로남불적 낭만주의’와 결합해 세대가 되고 대중이 되었다. 이념에 경도된 게 아니다. 시대에 염색된 것이다. 그 대가로 한국사회는 판단시스템이 붕괴됐다. 여전한 환멸이 아무리 우리를 괴롭힌들 예전 그 ‘느림’의 자리에 ‘견딤’을 두어야 한다. ‘시간의 힘’을 믿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이건 견딤을 말하는 것인가, 극복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