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AI가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질까
남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테오도르는 영화 ‘그녀(Her)’의 주인공입니다. 2013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테오도르가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지면서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최근에는 생성형 AI ‘GPT-4o’ 때문에 재조명받고 있지요.

흔히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합니다. 국경도, 나이도, 인종도, 또 종교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죠.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지만 대상을 좀 더 확장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고 유산을 상속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AI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어떨까요?

다시 테오도르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대필의 흔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편지로 읽는 이에게 감동의 쓰나미를 경험하게 하는 테오도르는, 정작 자신의 서툰 감정 때문에 사랑했던 아내 캐서린과 이혼 절차를 밟으며 매일 밤 ‘이불킥’으로 괴로워합니다.

타인에게는 행복을 주는 일과와 무덤덤한 본인의 일상을 반복하던 어느 날, 만성적 불감증에 시달리던 테오도르의 오감을 활짝 열어젖히게 한 존재가 그의 앞에 딱! 나타납니다. 이름은 ‘사만다’. 정체는 바로 AI였습니다. 사만다는 AI 운영체제로 시작해 개인형 비서에서 친구로, 그리고 ‘찐친’이 됐다가 곧 ‘여친’으로 발전하죠.

일종의 기계에 불과한 AI가 어떻게 인간 테오도르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었을까요? AI는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낼 뿐, 진짜 감정을 가진 존재도 아닌데 말이죠. 최근 생성 AI와 대화를 나눠보고 ‘신세계를 경험’했다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 사람 중에는 또 최근 몇 년 사이에 자신이 나눈 대화 가운데 가장 밀도 깊은 대화를 나눴노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계와 말이죠.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모모처럼,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축복일 겁니다. 잘 들어주기, 즉 경청의 윤리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일수록 중요한 가치입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때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런 관계에서 비로소 공감과 신뢰가 생겨나겠죠.

AI는 남의 이야기를 심지어 끊지도 않고, 그저 열심히 들어주는 존재일 겁니다. 그러니 테오도르의 급격한 심경 변화도 짐작이 갑니다. 타인의 감정 처리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던 테오도르였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이렇게 ‘내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AI가 세상에 나와서 그 기능이 고도화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일이 어려워지지 않을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 입장과 생각과 감정이 제각각이어서 자꾸 내 말에 토를 달고 지적질을 하고 공감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AI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요.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만남과 헤어짐이란 관계 속에서 그동안 자신의 서툰 감정과 사랑했던 아내와 헤어짐의 이유 등을 깨닫습니다. 그러고는 남을 위해 대신 써주는 편지가 아니라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이메일을 캐서린에게 보냅니다.

요즘은 타인 때문에 겪는 감정노동이 힘들어 교우관계도 연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하는데요. 이런저런 귀찮음으로 인해 감정노동을 피하기만 한다면 사람은 점점 더 기계같이 감정이 무뎌지고 기계(AI)는 점점 더 사람처럼 감정이 풍부해지는 해괴한 미래를 앞당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상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