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미포가 건조한 화학제품운반선(PC)선 시운전 모습.  /한국조선해양 제공
HD현대미포가 건조한 화학제품운반선(PC)선 시운전 모습. /한국조선해양 제공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이 중형조선사에 대한 선수급환급보증(RG) 발급을 재개한다. 조선업 불황을 이기지 못한 중형조선사들의 줄도산이 이어진 2013년 이후 11년 만이다. 수주에 성공하고도 금융 보증 격인 RG발급에 실패해 일감을 놓쳐온 중형조선사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수출과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합동으로 내놓은 극복책이다.

◆RG 특례보증 비율 95%로 상향

산업통상자원부와 금융위원회는 부처 합동으로 17일 ‘K-조선 수출금융 지원 협약식’과 조선기업 간담회를 개최하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조선업 수출·수주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1분기 한국이 3년 만에 중국을 제치고 세계 조선업 수주액 1위 자리를 탈환했지만 친환경선 시장에서 중국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등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수출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민관이 합동으로 내놓은 대책이다.

이날 행사에는 △5대 시중은행(국민·하나·신한·우리·농협은행) 행장, △3개 지방은행(경남·광주·부산은행) 행장, △4개 정책금융기관(산업은행·기업은행·무역보험공사·수출입은행) 기관장, △3개 조선사(HD현대중공업, 대한조선, 케이조선)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번 대책의 핵심은 11년 간 중형조선사에 대한 RG발급을 중단했던 시중은행들의 복귀다. RG는 조선사가 선박을 수주하면서 받는 선수금(건조대금의 약 40%)에 대해 금융기관들이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해 환급할 것을 보증하는 제도다. 발주처 입장에선 선지급금을 떼일 것을 우려해 조선사가 RG를 받아와야만 계약을 체결한다. 수주에 성공하더라도 RG를 발급 받지 못하면 조선사는 수주 계약을 체결할 수 없는 셈이다.

산업부는 중형조선사에 대한 시중은행들의 RG발급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무역보험공사의 특례보증 비율을 기존 85%에서 95%로 상향하기로 했다. 시중은행이 선박 선수금의 100%만큼 RG를 발급해주면 그 중 95%는 무보가 보증을 서 파산 등 리스크가 발생하더라도 시중은행들의 실부담을 5%로 줄여준다는 의미다.

정부는 2023년 4월 시중은행들의 RG발급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특례보증 비율을 중형사 기준 기존 70%에서 85%로 높였다. 그럼에도 일부 지방은행만이 RG발급에 나서는 등 시중은행들의 참여가 지지부진하자 1년 2개월만에 사실상 100%에 가까운 수준으로 지원율을 높인 것이다.

이 같은 정부의 지원책에 9개 은행은 케이조선(구 STX조선)과 대한조선이 수주에 성공했지만 RG발급을 받지 못했던 9척에 대해 2억6000만달러 규모의 RG를 발급하기로 결정했다. 두 조선소가 올해 수주한 20척의 선박 가운데 45%에 달하는 숫자로 수주 규모만 7억달러(1조원)에 달한다. RG발급이 난항을 겪으면서 수주 취소 위기에 빠졌던 1조원 가량의 일감이 이번 조치로 되살아난 셈이다.

산업은행도 중형 조선사가 수주한 선박들에 대해 자체적으로 2억6000만달러의 RG를 발급할 예정이다. RG 발급에 따라 총 5억7000만달러(7500억원) 규모의 선박 6척의 건조가 순조롭게 진행될 예정이다. 향후 수주 계약 건에 대해서는 선박 인도 일정에 따라 1억6000만달러의 RG를 발급할 예정이다.

시중은행들은 조선업 공급 과잉 여파로 조선사들의 줄도산이 이어진 2013년을 기점으로 중형조선사에 대한 RG발급을 중단했다. 이후 RG발급은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 중심으로 이뤄져왔다. 그 결과 2022년 중형조선사 전체 수주의 44%에 달하는 8척의 중대형 컨테이너선 수주가 RG미발급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중국 추격 위기감 반영...빅3 한도도 높여

중형조선사 뿐 아니라 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소위 ‘빅3’를 위한 대책도 마련됐다. 빅3 지원의 핵심은 RG 발급한도 상향이다. 그간 대형 조선사에 대해선 5대 시중은행,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총 8개 은행이 RG 발급을 분담해 왔다.

영국 조선·해운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달 신조선가지수는 186.42를 기록했다. 조선업 호황이 절정기였던 2008년 10월 187.19를 기록한 이후 최고치로, 3년 전인 2021년 6월(138.8)에 비해 선가가 35%나 오른 셈이다.

이처럼 선가가 오른 가운데 대형사 중심으로 수주 호조가 이어지면서 올해 은행들이 각각 설정한 RG발급 한도 대부분이 이미 소진된 것으로 전해진다. 빅3 입장에선 너무 장사가 잘돼 수주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8개 은행은 현대계열 3사(HD현대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와 삼성중공업에 총101억달러(14조원)의 신규 RG 한도를 부여하기로 했다.

순항 중인 조선업 수주를 지원해 2위 중국과의 격차를 벌린다는 것이 이번 정책의 표면상 배경이지만 이면엔 이대로면 그간 우위를 점했던 친환경선에서조차도 중국에 밀릴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담겨 있다.

산업부는 지난 3일 발표한 ‘수출여건 점검 및 추가 지원방안’에서 조선산업에 대해 “경쟁국과의 격차 축소가 우려된다”고 언급했다. 그 근거론 2020년 68%에 달했던 한국의 친환경선 시장 점유율이 2023년 40.6%로 떨어지는 사이 중국의 점유율이 23.5%에서 49.2%로 완전히 역전했다는 점을 들었다.
산업연구원 역시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R&D 격차가 빠르게 줄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조선산업 R&D·설계 부문의 한국과 중국 사이 점수 격차는 2021년 9포인트(한국 89.1, 중국 80.1)였으나 지난해에는 2.8포인트(한국 92.6, 중국 89.8)로 감소했다.

조선업 가치사슬(밸류체인) 종합경쟁력에서는 중국이 90.6점을 얻어 88.9점을 얻은 한국을 1.7포인트 앞섰다. 중형 조선소들의 도산으로 관련 협력사 등 밸류체인이 붕괴된 여파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K-조선 세계 1위 유지를 위한 산업 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형 및 중형 조선사의 동반 발전이 매우 중요”하다며 “수주-건조-수출 全주기에 걸쳐 민관이 원팀으로 총력 지원하는 한편, 후발 경쟁국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한 ‘K-조선 초격차 기술 로드맵’을 7월중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과거 조선업 침체로 중단됐던 시중은행의 중형 조선사 RG 발급이 재개된 것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며 “앞으로도 조선사의 금융애로가 없도록 지원하고 업계와 지속 소통하여 점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황정환/정영효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