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해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자신에게 총을 겨눈 납치범에게 사립 탐정 존 슈거(콜린 파렐)가 정중하게 말한다. 뻔한 대사 같지만 슈거는 진심이다. 결국 놈들을 맨손으로 쓰러 눕힌 직후, 슈거는 괴로워한다. 나는 원래 이런 잔혹한 인간이 아니라며.
애플TV+ 8부작 <슈거>
애플TV+ 8부작 <슈거>
애플TV+의 누아르 스릴러 <슈거>의 주인공은 완벽에 가깝다. 각국 언어를 며칠 만에 통달한 두뇌. 따뜻한 마음씨. 좀처럼 구겨지지 않는 슈트 스타일. 여기에 10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주량까지. 인기 탐정물 중에 이 정도로 완전체가 있었을까.

여기까지였다면 우아한 스릴러에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8회까지 완결된 <슈거>는 이색적인 반전으로 더욱 기억되는 드라마다. 시청자의 호불호를 단숨에 결정지을 과감한, 또는 위험한 시도가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하다. 야쿠자의 딸을 납치범으로부터 구해낸 슈거는, 일본에서 미국 LA로 돌아온다. 잘 나가는 영화 제작자 조너선 시걸(제임스 크롬웰)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늘 사고 치던 딸 올리비아(시드니 챈들러)가 사라졌으니, 조용히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애플TV+ 8부작 <슈거>
애플TV+ 8부작 <슈거>
영화 마니아인 슈거에겐 반가운 임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영화의 명장면과 대사들을 떠올리고, 혼자 쉴 땐 영화 칼럼을 읽는 그다. 올리비아의 흔적을 따라가던 슈거는 할리우드 영화업계의 어두운 과거에 휘말리게 된다.

슈거를 돕는 동료들 또한 갈수록 수상해진다. 슈거에게 사건을 중개하는 루비(커비)를 비롯, 슈거의 주변인들이 한 결사체의 구성원임이 드러난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는 후반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LA의 화창한 햇빛 아래, 빛나는 슈퍼카(쉐보레 콜벳)를 몰고 다니는 슈거의 모습은 낭만적이다. 하지만 그가 마주하는 것은 영화계의 추악한 진실들이다. 슈거는 같은 공간을 무대로 한 누아르 영화 < LA 컨피덴셜 >(1998)을 떠올리며 즐거워한다.
애플TV+ 8부작 <슈거>
애플TV+ 8부작 <슈거>
슈거가 더 자주 언급하는 영화들은 누아르 명작 <빅 슬립>(1946)과 같은 것들이다. 험프리 보가트가 탐정 필립 말로를 연기했고, 로렌 바콜이 치명적 매력을 뽐냈던. 그가 상기해내는 고전영화의 흑백 장면들은 수시로 드라마에 끼어든다. 다채로운 장면 전환과 빠른 호흡 덕분에 스릴러로서의 <슈거> 또한 적절한 긴장감을 이어간다.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사설 탐정의 세계에서, 슈거는 독특하다. 거리 위 노숙자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고, 버려진 강아지를 기꺼이 맡는 공감 능력이 그에겐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기대보다 늘 무자비하고, 슈거 또한 내밀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누아르 스릴러다운 사건 해결이 착착 진행되던 와중에, 갑작스러운 진실이 하나 드러난다. 그것도 극적 긴장이 가장 고조된 6화 즈음에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내용과 방식의 반전이다.

위험한 시도다. 어떤 밑밥도 예고도 없었던 이 반전이 드라마에 대한 몰입을 확 떨어뜨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이색적인 진실 때문에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슈거라는 미묘한 인물을 이해하는 데 완전히 새로운 힌트가 되기 때문이다.
애플TV+ 8부작 <슈거>
애플TV+ 8부작 <슈거>
이쯤에서야 콜린 파렐의 연기가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 (2015)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사랑을 추종했고, 같은 감독의 <킬링 디어>에선 무력한 발버둥으로 비극에 맞서던 그였다.

슈거 또한 완벽한 외면과 달리, 내면으로는 끝없이 질문을 되새김질하는 인물이다. 이색적인 반전을 통해 그 질문의 맥락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들, 그가 쓰는 기록들 또한 새로운 의미로 뇌리를 스치게 된다. (‘장난치나’ 싶었던 시청자들도 이 효과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신선함 또는 당황스러움을 논외로 쳐도, <슈거>는 매끈하고 모범적인 누아르 스릴러다. 탐정은 사건을 해결해가며, 그 결과 자신을 옥죄었던 과거와 맞설 수 있게 된다. 시즌 2가 나온다면, 아마도 그 본격적인 싸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유미 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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