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랜드마크vs랜드마크] 조르주 페렉의 방과 몽득선생의 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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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영화제작자로 다양한 장르 활동을 한 전위 작가 조르주 페렉이 1974년 쓴 <공간의 종류들>을 읽어보면, 실용성이나 미적 감응에 기반을 둔 우리들의 공간에 대한 인식을 좀 달리 보게 만든다. 그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효과(향기가 기억을 되살린다는)에 의해 기억되는, 자신이 경험했다고 생각되는 방의 숫자를 대략 200곳으로 정리해냈고, 그곳들을 유형화하여, 내 방이었던 곳과 친구들의 방, 공동침실, 시골집들, 호텔 방들, 그리고 우연한 잠자리들과 기차나 비행기 안의 공간들 등으로 축약하였다.
그가 분류한 방의 유형은 그 방들이 어떤 벽지를 했다거나 어떤 모양이거나 하는, 방 그 자체로서의 그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는 이 방들을 통해 그의 다른 기억을 찾아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자신 이 방에 산다는 것, 또는 방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소유권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벽에 우편엽서를 붙였거나 분홍색 양말을 빨았을 때이거나, 그곳에서 기다림의 고통을 느꼈을 때이거나, 극심한 치통을 느꼈을 때일까? 라고 자문한다. 이어서 아파트와 같이 방이 여러 개 있는 공간을 설명하면서는 왜 우리의 아파트들이 거실이나 주방, 침실처럼 기능을 구분한 방들에 의해 구분되어야 하는지, 기억을 좌우하는 감각에 맞춰 미각실, 후각실, 청각실 등으로 구분하거나 월요일실, 화요일실, 수요일실 등의 요일실로 구분하면 안 되는지, 알래스카의 추위가 느껴지는 방, 아프리카의 밀림 같은 방, 비행기 창문을 가진 방 등, 우리의 기분을 맞춰주는 다양한 주제들의 방이 있을 수 있음을 제안한다.
조르주 페렉은 우리가 공간을 느끼지만 그것은 공간 자체의 미학이나 기능으로 우리의 삶을 엮어 내는 것이 아니고 기능을 잇는 기억의 단편들이나 공간 속에서 벌어졌던 기억에 남을 만한 기이한 경험들이 기억날 때임을 명확히 말해준다. 공간을 경험한 일반인의 마음속에는 건축물의 유형은 남아 있지 않고, 하찮게 보이는 기억의 편린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멋진 주택도 집에 비가 샌다면 격노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일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글로써 표현한 현대 서양의 유명한 작가의 공간에 대한 생각은 동양의 오래된 시구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나라 시대의 학자 몽득 유우석 선생이 쓴 ‘누실명’을 보면,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다.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한 물이다. 이곳은 비록 누추한 집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중략) 즉, 신선이나 용이 그곳의 좋은 점 때문에 기거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기거하기에 그곳이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공간이 가진 다양한 가치들과 특징들을 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들 면 그것이 최고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실, 허름한 집도 거주자가 만족하면 좋은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누추한 집이 자신이 만족하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이 없음을 나타내는 글이지만, 이글의 배경은 바로 자신이 중앙정계에 나가지 못하고, 시골의 한 허름한 정자에서 머물며, 만족하며 살고 있다는 도가적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분, 능력과 삶의 태도에 맞춰 환경의 가치를 알맞게 자신의 가치관처럼 포장한 것처럼도 보인다.
몽득선생이 쓴 ‘누실명’을 보면, 멋지고 화려한 집을 추구하는 건축의 가치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엄청난 발언이지만, 사실 페렉이 언급한 방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그 방의 모습이 아니라 그 방에서 일어난 사건과 기억되는 마음 상태라는 것을 보면,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보여지는 실물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건축 전문가들이 공간의 가치로 추구하는 기능적 완결성이나 미적 아름다움의 뒤에 사람이 처한 상황과 태도라는 개별화된 가치가 내재하여 있다는 것을 다시 음미해 본다면 우리가 공간의 가치에 대해 논할 때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는 않을듯하다.
그가 분류한 방의 유형은 그 방들이 어떤 벽지를 했다거나 어떤 모양이거나 하는, 방 그 자체로서의 그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는 이 방들을 통해 그의 다른 기억을 찾아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자신 이 방에 산다는 것, 또는 방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소유권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벽에 우편엽서를 붙였거나 분홍색 양말을 빨았을 때이거나, 그곳에서 기다림의 고통을 느꼈을 때이거나, 극심한 치통을 느꼈을 때일까? 라고 자문한다. 이어서 아파트와 같이 방이 여러 개 있는 공간을 설명하면서는 왜 우리의 아파트들이 거실이나 주방, 침실처럼 기능을 구분한 방들에 의해 구분되어야 하는지, 기억을 좌우하는 감각에 맞춰 미각실, 후각실, 청각실 등으로 구분하거나 월요일실, 화요일실, 수요일실 등의 요일실로 구분하면 안 되는지, 알래스카의 추위가 느껴지는 방, 아프리카의 밀림 같은 방, 비행기 창문을 가진 방 등, 우리의 기분을 맞춰주는 다양한 주제들의 방이 있을 수 있음을 제안한다.
조르주 페렉은 우리가 공간을 느끼지만 그것은 공간 자체의 미학이나 기능으로 우리의 삶을 엮어 내는 것이 아니고 기능을 잇는 기억의 단편들이나 공간 속에서 벌어졌던 기억에 남을 만한 기이한 경험들이 기억날 때임을 명확히 말해준다. 공간을 경험한 일반인의 마음속에는 건축물의 유형은 남아 있지 않고, 하찮게 보이는 기억의 편린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멋진 주택도 집에 비가 샌다면 격노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일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글로써 표현한 현대 서양의 유명한 작가의 공간에 대한 생각은 동양의 오래된 시구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나라 시대의 학자 몽득 유우석 선생이 쓴 ‘누실명’을 보면,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다.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한 물이다. 이곳은 비록 누추한 집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중략) 즉, 신선이나 용이 그곳의 좋은 점 때문에 기거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기거하기에 그곳이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공간이 가진 다양한 가치들과 특징들을 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들 면 그것이 최고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실, 허름한 집도 거주자가 만족하면 좋은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누추한 집이 자신이 만족하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이 없음을 나타내는 글이지만, 이글의 배경은 바로 자신이 중앙정계에 나가지 못하고, 시골의 한 허름한 정자에서 머물며, 만족하며 살고 있다는 도가적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분, 능력과 삶의 태도에 맞춰 환경의 가치를 알맞게 자신의 가치관처럼 포장한 것처럼도 보인다.
몽득선생이 쓴 ‘누실명’을 보면, 멋지고 화려한 집을 추구하는 건축의 가치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엄청난 발언이지만, 사실 페렉이 언급한 방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그 방의 모습이 아니라 그 방에서 일어난 사건과 기억되는 마음 상태라는 것을 보면,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보여지는 실물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건축 전문가들이 공간의 가치로 추구하는 기능적 완결성이나 미적 아름다움의 뒤에 사람이 처한 상황과 태도라는 개별화된 가치가 내재하여 있다는 것을 다시 음미해 본다면 우리가 공간의 가치에 대해 논할 때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는 않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