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세비야에 젊은 백작이 살았다. 그는 지체 높은 귀족이지만, 돈과 권력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여자를 유혹하는 데만 모든 정열을 쏟았다. 하인 레포렐로를 대동하고는 스페인 전역과 온 유럽, 심지어는 튀르키예까지 건너가 여성들을 유혹했는데 그 숫자만 2000여 명에 이른다. 그의 이름은 돈 조반니(Don Giovanni), 스페인에서 가장 이름난 호색한이다.
돈 조반니(Don Giovanni) 의 1788년 5월 7일 빈에서의 초연을 위한 극본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돈 조반니(Don Giovanni) 의 1788년 5월 7일 빈에서의 초연을 위한 극본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오페라 속 돈 조반니는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각기 다른 세 명의 여성들과 조우한다. 첫 번째는 돈나 안나다. 그녀는 지체 높은 기사장의 딸로, 귀족 집안의 여인이다. 조반니는 야밤에 안나를 유혹하러 침입했다가 그녀의 아버지인 기사장과 마주친다. 결투 끝에 기사장을 죽인 조반니는 하인 레포렐로와 함께 황급히 도망치고 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바로 이 장면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이다.

두 번째 여인은 돈나 엘비라이다. 그녀는 부르주아, 즉 중산 시민계층의 여인이다. 젊은 시절 조반니의 유혹을 받아 사랑에 빠졌지만, 곧 그에게 버림받는다.

마지막은 시골 농부의 딸 체를리나다. 그녀는 평범한 농부 마제토와 결혼식을 준비하다 세련된 귀족 조반니와 마주친다. 체를리나의 풋풋한 미모와 앙증맞은 애교에 매혹된 조반니는 현란한 화술로 그녀를 유혹한다. 망설이던 체를리나는 결국 조반니의 달콤하고 우아한 유혹에 빠져들지만, 끝내 마제토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는다. 가장 솔직하고, 정제되지 않은 욕망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귀족 사회를 동경하고, 달콤한 사랑 속에 신분 상승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결국엔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현실적인 여성이다.
1790년대 프라하에서의 공연으로 추정되는 <돈 조반니> 2막 씬의 가장 초기 세트 디자인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790년대 프라하에서의 공연으로 추정되는 <돈 조반니> 2막 씬의 가장 초기 세트 디자인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렇게 난봉꾼 행각을 이어가던 돈 조반니에게도 최후가 찾아온다. 돈나 안나의 아버지인 기사장이 혼백의 석상(石像)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베이스가 노래하는 석상과 바리톤이 부르는 돈 조반니, 두 명의 남성 저음 가수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 펼치는 피날레 장면은 이 오페라의 백미다. 석상은 그에게 지난 인생을 회개하라며 크게 꾸짖는다. 그러나 돈 조반니는 한마디로 거절한다. 나는 반성 같은 걸 모르는 남자라는 것이다.

석상 : 네 삶의 최후가 다가온다. 회개하라!
돈 조반니 : 아니, 난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아. 귀신아, 썩 내 앞에서 꺼져라!
막스 슬레포크트가 그린 <돈 조반니>에서 돈 조반니 역을 맡은 프란시스코 안드라데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막스 슬레포크트가 그린 <돈 조반니>에서 돈 조반니 역을 맡은 프란시스코 안드라데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결국 돈 조반니는 석상의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진다. 탕아와 난봉꾼들의 이야기에 늘상 등장하는 권선징악의 ‘뻔한 결말’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은근히 묘한 뒤틀림이 있다. 돈 조반니는 지옥 불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버린다. ‘귀신한테 잔소리나 들으며 뉘우치느니 그냥 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런 당돌함에서 모차르트의 예술가적 자존감을 읽어낸다. 당대의 귀족 사회로부터 끊임없는 견제와 하대에 시달렸던 모차르트 눈에는 관습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탕아 돈 조반니야말로 오히려 ‘자유로운 미래 예술가’의 모델이었을 거란 이야기다.
모차르트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모차르트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오페라 속 모차르트의 음악은 생기 넘치는 발랄함과 심오한 예술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목관 앙상블을 연상케 하는 정교한 중창이 이어지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아리아와 달콤한 세레나데와 발라드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사랑’이라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테마를 연결고리로 다채로운 인간들의 모습을 가장 입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돈 조반니>는 삶의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직시하는 오페라이다. 그 당당함이 이 작품에 ‘영원불멸의 고전’이라는 온당한 찬사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황지원 오페라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