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내내 이어지는 줄라이 페스티벌에 포스트잇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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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선애의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
공연 세팅의 노하우 : 포스트잇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공연 세팅의 노하우 : 포스트잇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콘의 시계는 7월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여름마다 열리는 특별한 축제 ‘줄라이 페스티벌’을 위해서다. 7월 한 달간 매일 공연이 이어지는 줄라이 페스티벌은 테마 작곡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프로젝트로 그동안 베토벤(2020), 브람스(2021), 바르톡(2022), 슈베르트(2023)를 조명해 왔다. 5년 차를 맞은 올해의 작곡가는 로베르트 슈만이다.
▶▶▶[관련 뉴스] 7월 한달간 펼쳐지는 슈만의 음악세계, 줄라이페스티벌
한 해 한 해 작곡가들과 뜨겁게 만나온 그 여름을 돌이켜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하느냐”였다. 한 달이라는 기간을 쉼 없이 매일, 미련할 정도로 파고들어서 받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왜 그렇게까지…”가 숨겨진 것인지도 모른다. “왜”가 아닌 “어떻게”로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작곡가의 모든 작품을 찾아라
줄라이 페스티벌의 준비는 테마 작곡가의 작품을 조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주요 작품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 작곡가가 남긴 모든 곡을 폭넓게 조사하는 이 작업은 한 달이라는 기간 속에서 어떤 작품을 어느 날짜에 배치할지, 또 하루 60~70분의 공연을 위해 어떤 작품을 함께 배치할지 등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다.
작품명, 악기 편성, 작곡 연도 및 출판 연도, 연주 소요 시간의 조사를 일차적으로 마치고 나면 편곡 작품의 존재 여부와 작품의 중요도까지 엑셀 파일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데, 이후의 모든 세팅이 바로 이 엑셀로부터 시작되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1천 곡에 달하는 슈베르트의 작품을 조사하는 일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고, 국내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던 바르톡은 일찌감치 해외원서를 주문해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그다음은 포스트잇 차례다. 포스트잇은 하콘에서 공연을 만들 때 사용하는 가장 비밀스러운 도구다. 떼었다 붙이기 용이한 점을 활용해 연주될 한 달간의 곡목 배치 등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전체적인 흐름을 매만지는데, 이 작업을 위해 엑셀 파일이 정리되자마자 파일의 방대한 내용을 ‘작품명, 악기 편성, 소요 시간’으로만 요약해 포스트잇에 옮겨 적는다. 그리고 7월의 달력이 된 사무실 한쪽 벽면에서 박창수 선생님의 손에 의해 하나씩 붙였다 떼어지기를 반복한다. 사실상 줄라이 페스티벌의 핵심 작업이다. 5천 명 연주자 풀을 조사하라
누군가 작품 조사에 매진하는 동안 누군가는 연주자 풀을 업데이트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운다. 22년간 함께해 온 5천여 명의 연주자 명단을 악기별로 정리하고, 새로운 연주자를 업데이트하는 일도 작품 조사 못지않게 중요하다. 작업을 하다 보면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이름이 있는가 하면, 이 페스티벌을 통해 처음 만나보고 싶은 이들도 생기고, 계속 연주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이들도 있다. 간혹 있는 일이지만, 지난 무대에서 준비되지 않은 연주나 자세를 보인 경우에는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우리의 리스트에서는 영원히 제외되기도 한다.
연주자 목록이 완성되면 역시 포스트잇이 기다리고 있다. 연주자들의 이름이 기재된 포스트잇이 사무실 벽을 가득 채우면, 연주될 곡목과 연주자를 매칭하는 섭외 작업이 시작된다. 때로는 우리가 직접 곡을 지정해 연주자에게 요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주자로부터 희망 작품을 받기도 하는데, 곡목별 매칭이 끝나면 연주자 이름이 쓰인 포스트잇을 곡목 옆에 나란히 옮겨 붙이며 빈 곳을 채워 나간다.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벽면이 바로 줄라이 페스티벌의 진행 상황을 알 수 있는 현황판인 셈이다. 대체로 한 연주자가 한 곡만 연주하다 보니 7월을 수놓는 작품별로 매칭되는 연주자의 수도 상당하다. 그렇게 줄라이 페스티벌은 매해 150~200명에 달하는 연주자들과 함께 해왔다. 이렇게 많은 연주자들이 언제나 기꺼이 이 여름에 동참해 주는 것 역시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하콘만의 특별한 풍경
줄라이 페스티벌이 가지는 한 달의 흐름은 결코 대충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루의 공연보다는 한 달이라는 기간을 하나의 호흡으로 보고 그 구조를 고려하기에, 포스트잇을 앞에 두고 수없이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한 달간 매일 공연이 진행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전임에도 여기에 매해 실험적인 시도를 더해 페스티벌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020년 베토벤의 해에 32개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32명의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한 13시간의 릴레이 콘서트는 기념비적인 도전으로 기록되었으며, 2023년 슈베르트 21개 피아노 소나타 전곡 11시간 연주로 재현되었다. 릴레이 연주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모인 관객들이 공연 끝까지 자리를 지킨 모습과 공연을 마친 연주자들이 다시 하우스로 들어와 관객으로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은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광경이었다.
2022년 바르톡의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을 한국 초연한 일은 작은 공간이 가지는 규모의 한계를 넘는 하콘만의 실험적 시도를 선보였고, 2023년 슈베르트 교향곡 연주와 올해 슈만 피아노 협주곡 연주로 그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약 40명에 관객 40여 명으로 꽉 채워진 공간은 이제 하콘 여름 축제만의 특별한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진화하는 하콘의 페스티벌
줄라이 페스티벌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던 해인 2020년에 베토벤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으로 기존 하콘이 해온 축제에 변화를 주면서 시작됐다. ‘원데이 페스티벌’(2013-2014)에서 ‘원먼스 페스티벌’(2015-2018)로 발전한 축제가 팬데믹을 맞으면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의도치 않게 변화의 시기를 맞았지만, 그것을 필연으로 만들어온 이야기는 이전 글을 통해 밝힌 바 있다 ([관련글] 위기를 기회로, 우연을 필연으로).
원데이나 원먼스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변화해 왔듯, 줄라이 페스티벌 역시 베토벤을 기점으로 필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며 진화해 온 하우스콘서트답게 줄라이 페스티벌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 독특한 하콘의 여름 축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한 달이라는 기간 매일 공연장의 문을 열어 한 작곡가의 작품과 생애를 이토록 집요하게 파고드는 축제가 있는지 되묻겠다. 한 번은 할 수 있어도 몇 년을 지속시키기는 어렵고, 그런 점에서 줄라이 페스티벌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7월 한 달, 잠시 눈과 귀를 열어 작곡가의 숨결을 따라가 보는 것은 기획자, 연주자, 관객 모두에게 소중한 기회다. 촘촘히 계획된 7월의 흐름에 따라 작곡가를 집중적으로 만나고 이해하는 특별한 시간을 이번에도 많은 분들과 함께하길 바란다.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
▶▶▶[관련 뉴스] 7월 한달간 펼쳐지는 슈만의 음악세계, 줄라이페스티벌
한 해 한 해 작곡가들과 뜨겁게 만나온 그 여름을 돌이켜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하느냐”였다. 한 달이라는 기간을 쉼 없이 매일, 미련할 정도로 파고들어서 받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왜 그렇게까지…”가 숨겨진 것인지도 모른다. “왜”가 아닌 “어떻게”로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작곡가의 모든 작품을 찾아라
줄라이 페스티벌의 준비는 테마 작곡가의 작품을 조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주요 작품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 작곡가가 남긴 모든 곡을 폭넓게 조사하는 이 작업은 한 달이라는 기간 속에서 어떤 작품을 어느 날짜에 배치할지, 또 하루 60~70분의 공연을 위해 어떤 작품을 함께 배치할지 등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다.
작품명, 악기 편성, 작곡 연도 및 출판 연도, 연주 소요 시간의 조사를 일차적으로 마치고 나면 편곡 작품의 존재 여부와 작품의 중요도까지 엑셀 파일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데, 이후의 모든 세팅이 바로 이 엑셀로부터 시작되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1천 곡에 달하는 슈베르트의 작품을 조사하는 일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고, 국내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던 바르톡은 일찌감치 해외원서를 주문해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그다음은 포스트잇 차례다. 포스트잇은 하콘에서 공연을 만들 때 사용하는 가장 비밀스러운 도구다. 떼었다 붙이기 용이한 점을 활용해 연주될 한 달간의 곡목 배치 등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전체적인 흐름을 매만지는데, 이 작업을 위해 엑셀 파일이 정리되자마자 파일의 방대한 내용을 ‘작품명, 악기 편성, 소요 시간’으로만 요약해 포스트잇에 옮겨 적는다. 그리고 7월의 달력이 된 사무실 한쪽 벽면에서 박창수 선생님의 손에 의해 하나씩 붙였다 떼어지기를 반복한다. 사실상 줄라이 페스티벌의 핵심 작업이다. 5천 명 연주자 풀을 조사하라
누군가 작품 조사에 매진하는 동안 누군가는 연주자 풀을 업데이트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운다. 22년간 함께해 온 5천여 명의 연주자 명단을 악기별로 정리하고, 새로운 연주자를 업데이트하는 일도 작품 조사 못지않게 중요하다. 작업을 하다 보면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이름이 있는가 하면, 이 페스티벌을 통해 처음 만나보고 싶은 이들도 생기고, 계속 연주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이들도 있다. 간혹 있는 일이지만, 지난 무대에서 준비되지 않은 연주나 자세를 보인 경우에는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우리의 리스트에서는 영원히 제외되기도 한다.
연주자 목록이 완성되면 역시 포스트잇이 기다리고 있다. 연주자들의 이름이 기재된 포스트잇이 사무실 벽을 가득 채우면, 연주될 곡목과 연주자를 매칭하는 섭외 작업이 시작된다. 때로는 우리가 직접 곡을 지정해 연주자에게 요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주자로부터 희망 작품을 받기도 하는데, 곡목별 매칭이 끝나면 연주자 이름이 쓰인 포스트잇을 곡목 옆에 나란히 옮겨 붙이며 빈 곳을 채워 나간다.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벽면이 바로 줄라이 페스티벌의 진행 상황을 알 수 있는 현황판인 셈이다. 대체로 한 연주자가 한 곡만 연주하다 보니 7월을 수놓는 작품별로 매칭되는 연주자의 수도 상당하다. 그렇게 줄라이 페스티벌은 매해 150~200명에 달하는 연주자들과 함께 해왔다. 이렇게 많은 연주자들이 언제나 기꺼이 이 여름에 동참해 주는 것 역시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하콘만의 특별한 풍경
줄라이 페스티벌이 가지는 한 달의 흐름은 결코 대충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루의 공연보다는 한 달이라는 기간을 하나의 호흡으로 보고 그 구조를 고려하기에, 포스트잇을 앞에 두고 수없이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한 달간 매일 공연이 진행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전임에도 여기에 매해 실험적인 시도를 더해 페스티벌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020년 베토벤의 해에 32개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32명의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한 13시간의 릴레이 콘서트는 기념비적인 도전으로 기록되었으며, 2023년 슈베르트 21개 피아노 소나타 전곡 11시간 연주로 재현되었다. 릴레이 연주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모인 관객들이 공연 끝까지 자리를 지킨 모습과 공연을 마친 연주자들이 다시 하우스로 들어와 관객으로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은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광경이었다.
2022년 바르톡의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을 한국 초연한 일은 작은 공간이 가지는 규모의 한계를 넘는 하콘만의 실험적 시도를 선보였고, 2023년 슈베르트 교향곡 연주와 올해 슈만 피아노 협주곡 연주로 그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약 40명에 관객 40여 명으로 꽉 채워진 공간은 이제 하콘 여름 축제만의 특별한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진화하는 하콘의 페스티벌
줄라이 페스티벌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던 해인 2020년에 베토벤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으로 기존 하콘이 해온 축제에 변화를 주면서 시작됐다. ‘원데이 페스티벌’(2013-2014)에서 ‘원먼스 페스티벌’(2015-2018)로 발전한 축제가 팬데믹을 맞으면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의도치 않게 변화의 시기를 맞았지만, 그것을 필연으로 만들어온 이야기는 이전 글을 통해 밝힌 바 있다 ([관련글] 위기를 기회로, 우연을 필연으로).
원데이나 원먼스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변화해 왔듯, 줄라이 페스티벌 역시 베토벤을 기점으로 필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며 진화해 온 하우스콘서트답게 줄라이 페스티벌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 독특한 하콘의 여름 축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한 달이라는 기간 매일 공연장의 문을 열어 한 작곡가의 작품과 생애를 이토록 집요하게 파고드는 축제가 있는지 되묻겠다. 한 번은 할 수 있어도 몇 년을 지속시키기는 어렵고, 그런 점에서 줄라이 페스티벌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7월 한 달, 잠시 눈과 귀를 열어 작곡가의 숨결을 따라가 보는 것은 기획자, 연주자, 관객 모두에게 소중한 기회다. 촘촘히 계획된 7월의 흐름에 따라 작곡가를 집중적으로 만나고 이해하는 특별한 시간을 이번에도 많은 분들과 함께하길 바란다.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