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의 사물과 공간은 목적에 적합한 스케일-규모를 가진다. 이는 무엇보다 사용성의 문제와 연관되어 늘 쓰던 책상의 높이가 2cm만 높아져도 우리는 바로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일상적 장면들의 시각적 익숙함 또한 여기에서부터 형성된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The Listening Room>은 이러한 스케일의 문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방 안을 커다란 사과가 꽉 채우고 있는 그림을 보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이 그림을 보고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것이고, 이 당혹감은 당연히 사과의 크기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초현실'적인 현상은 익숙한 사물의 스케일 변화만으로도 쉽게 가능해진다.
르네 마그리트 (1952) / 이미지 출처.WikiArt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장난감이라 할 수 있는 레고는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블록을 기본 단위로 가진다. 이것을 하나하나 쌓아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행위가 많은 이들에게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건축적 행위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레고를 가지고 놀아본 사람들은 작은 블록을 쌓는 과정에서 다양한 상상을 했을 것이고, 그 블록들이 상상 속에서는 실제 벽돌과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만약 블록들이 실제 크기만 했다면 레고를 장난감이라고 하거나, 이것을 쌓는 행위를 단순히 놀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레고가 정말로 실제 세계의 스케일로 나타난다면 어떨까.
덴마크의 작은 마을 빌룬(Billund)은 레고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레고 본사, 생산공장, 레고랜드 등이 위치한, 레고의 생산부터 경험까지 모두 가능한 곳이다.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레고에 고용되어 있으며 레고가 창출하는 관광 효과는 지역 활성화의 원동력이 된다. 이곳에 2017년 들어선 '레고하우스'는 레고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을 건물의 외관에서부터 방문객들에게 전달한다.
덕후답게 유튜브 알고리즘은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최신(!) 소식을 부지런히 추천한다. 저작권을 가진 방송사만이 구현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고화질 영상으로 장식된 레퀴엠, 으름장과 울화라는 지극히 한국스러운 감정을 버무린 '강호동 협주곡' 등이 최근 알고리즘의 신이 덕후에게 간택해준 영상들이다. 교향곡, 그것도 말러나 브루크너 스케일의 우람하고 기골 장대한 곡을 들으며 망양지탄을 느끼다가도 이런 재기발랄하고 힙한(!) 영상으로 풀어낸 클래식 음악에 낄낄거리는 덕후의 삶이란...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다) 근엄하면서도 난잡한 덕후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신 알고리즘은 단연 계촌 클래식 축제, 일명 ‘레전드 포 핸즈'다. 왜 레전드냐 하면 바로 김선욱과 조성진의 네 손이 한 피아노 위를 유영하는 꿈같은 장면이기 때문이다. 곡목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푸릇한 야외 배경, 악보를 들고 엉거주춤 등장하는 김선욱, 멋쩍게 그러나 용기 있고 집중력 있게 페이지 터너 (연주자의 악보를 넘겨주는 보조인) 역할을 수행한 바이올린 단원, 야외 음향과 비전문 레코딩의 음질을 그냥 뚫고 나와 찬란하게 빛나는 조성진의 음색까지…. 완벽한 힐링 레전드 영상 그 자체였다. 출근길에 이 영상을 접한 후 얼마나 많은 포 핸즈를 찾아보았던지. 같은 곡을 15년 전의 조성진이 신수정 교수와 함께 연주한 포 핸즈 영상이 한경 arteTV 유튜브에 남아있었다. 스승과 함께하는 포 핸즈는 동료 뮤지션과 함께하는 포 핸즈와 큰 차이가 있어 좋은 비교가 되었다. [조성진 & 신수정 - 브람스 헝가리 무곡 (채널. 한경arteTV)] 주로 홀로 피아노 앞에 연주하던 피아니스트 두 명이 나란히 앉아 건반과 페달을 공유하며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니, 세팅 자체가 벌써 흐뭇하다. 당연히 뮤지션 간의 케미스트리가 중요하다. 빠르기부터 음악의 기승전결까지 정교하게 조율된 음악보다는, 케미스트리가 빚어내는 즉흥성이 오히려 미덕이 된다. 계촌 클래식 축제 현장에 있던 누구라도 오래도록 두 피아니스트의 그때 그 순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관련 뉴스] 김선욱과 조성진, 계촌마을에서 선보인 특별한 협연 운명인지 우연인지 요즘 가장 자주 듣는 앨범도 <포 핸즈-알렉상드르 타로와 친구들>이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가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진행한 포 핸즈 프로젝트가 앨범으로 나왔다. 시대상을 반영하듯 곡목들도 최단 1분에서 최장 6분가량의 짧은 곡들 위주다. 베아트리체 라나, 비킹구르 올라프손, 브루스 리우(조성진-김선욱의 포 핸즈와 같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이다!)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슈퍼스타 첼리스트 고티에 가퓌숑도 알렉상드르 타로와 피아노를 공유했으니 프로젝트의 규모가 남다르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된 니콜라스 안겔리치(관련 칼럼 읽기)가 타계 불과 1년 전 타로와 함께 연주한 장면(관련 영상 보기)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남아 있어 귀하다. 둘의 돌리 모음곡은 듣기만 해도 포근한 이불을 덮은 듯 따사롭기 그지없다. 돌리 모음곡은 원래부터 피아노 포 핸즈 곡이지만,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하이든 피아노 3중주 등 다른 형태의 원곡을 피아노 포 핸즈로 편곡한 곡들도 실려 있다. 수록된 대부분의 곡들이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소품들이지만 연주 퀄리티만큼은 굉장하다. 특히 라벨 장인 두명(베르트랑 샤메유, 알렉상드르 타로)이 만나 여유와 관록 넘치게 연주하는 '어미 거위 모음곡 5곡 [요정의 정원]'에서는 느릿하고 우아한 걸음걸이가 점차 무게감을 더하다가 박진감 넘치는 글리산도로 감쪽같이 이행해 마무리하는데 앨범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편의 멋진 드라마가 되었다 (관련 영상 보기).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이 알렉상드르 타로와 같이 연주한 '그리그: 4개의 노르웨이 무곡 2번'도 그의 팬이라면 환호하며 들을 만하다.포 핸즈에 대해 길게 썼지만 사실 우리 모두 자신 있는 포 핸즈가 하나씩 있다. 어렸을 적 친구와 함께 치던 ‘젓가락 행진곡'이 바로 포 핸즈다. 연탄곡이 포 핸즈로, 젓가락 행진곡이 필립 글래스의 Stokes로만 바뀌었을 뿐 음악을 좋아하고 리듬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때의 감정만큼은 여전하다. 3분의 시간을 내 조성진과 김선욱의 ‘레전드 포 핸즈’를 감상해 보면 어떨까. 내친김에 알렉상드르 타로의 앨범도 BGM 삼아 틀어놓아 일상에 음악의 품격을 더해 보기를 추천한다. /이은아 칼럼니스트 [조성진 & 김선욱 - 브람스 헝가리 무곡 5번 (채널. 셈플리치타)]
장쯔이(장자이·章子怡)는 마흔다섯이고, 언제부턴가 우리에겐 사라진 여인이 됐지만, 여전히 중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이며, 무엇보다 잊을 수 없게 하는 영화와 영화 장면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는 여인이다. 다수의 영화에서 그녀는 정말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였다.사람들은 이제 기억조차 안 하겠지만, 그리고 애당초 잘 알지도 못했겠지만, 장동건, 장바이즈(장백지·張柏芝), 장쯔이가 동시에 나왔던 한국 홍콩 중국 합작 영화 <위험한 관계>에서 그녀는 일생일대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이 한·중 홍콩영화 <위험한 관계>는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쓴 18세기 동명 소설을, 왜 그렇게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지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것 중의 하나인 작품이다.1959년 로제 바딤 감독이 잔 모로를 주연으로 내세워 영화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영국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이 존 말코비치, 미셸 파이퍼, 글렌 클로즈를 주연으로 해 영화로 만들었다. 1989년에는 폴란드 출신 밀로스 포먼이 <발몽>이란 제목으로, 1999년에는 라이언 필립, 리즈 위더스푼의 영화 <크루얼 인텐션>이란 제목의 영화로, 2003년에는 한국의 이재용 감독이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란 사극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다시 허진호 감독이 2012년에 장쯔이, 장바이즈, 장동건 주연의 원제 그대로의 영화 <위험한 관계>로 만들었다. 아 복잡해.허진호의 영화는 1988년 스티븐 프리어즈 판을 1930년대의 상하이를 무대로 재해석해낸 작품이고, 미끈하고 수려한 작품이었음에도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뒷얘기에 따르면 장쯔이는 만다린을 구사하는 배우였으며, 장바이즈는 광둥어로, 장동건은 만다린을 한글로 음을 옮겨 그것을 외워서 했다고 한다. 허진호 본인은 만다린도 광둥어도 할 줄 몰랐는데 신기하게도 영화는 제대로 만들어졌다. 비 중국어권 관객인 한국에서는 크게 어색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언어 문제가 흥행에서 가장 큰 약점으로 작동했던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더욱더 연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예컨대 실내 화원에서의 장쯔이, 장동건의 키스신이 그런 것이었다.희대의 플레이보이 세이판(장동건)이 신여성 모지에위(장바이즈)와의 내기 때문에 정숙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세이판은 어떻게든 뚜펀위와 키스하려 하고, 뚜펀위는 계속 그를 밀어내다가 화원에서의 밀회를 계기로 드디어 입술을 허락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이때는 세이판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키스를 멈춘다.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이려는 여자, 그 부정(不貞)을 시작하려는 여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그건 공포의 희열 같은 것, ‘나는 이제 무너질 거야’라는 일탈의 작정 같은 심정인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장쯔이의 온몸 연기는 실로 잊혀지지가 않는다.플레이보이라면 이런 순정파 여자를 잘못 건드리는 순간 자신이 이제 정착남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세이판이 머뭇거리는 것은 그 때문이고 이 일 때문에 그녀는 다시 그에게 문을 닫아거는데 폐렴으로 죽어가는 세이판이 잘못을 깨닫고 그녀가 사는 방문을 두드리지만, 여자는 그 안에서 문을 막아선 채 흐느낀다. 장쯔이는 온몸을 던져 명품 연기를 펼쳤다. 뛰어난 감정 연기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작품이었지만 당시의 신세대 감독들은 신파의 레트로 감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게다가 2008년 이후 장쯔이는 불륜과 금융사기 등으로 스캔들이 이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영화는 참으로 이런저런 일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의 운명은 실로 시어머니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이다.2013년에 발표된 왕자웨이(왕가위·王家衛) 감독의 <일대종사>에서도 장쯔이는 실제로 일대종사의 명연기를 펼친다. 한때 무예 명문가의 딸이었고 한 시대를 이끌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스러져가는 시대의 모습처럼 아편과 시한부의 질병으로 죽어가는 여인 궁이 역할이었다. 궁이는 자신이 흠모했던 남자 엽문(양조위)과 마지막으로 마주 앉는다. 궁이는 말한다. “살면서 후회가 없다는 말, 그거 다 하는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 후회한들 그 후회도 다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인생은 바둑과 같아요. 바둑처럼 매번 알 수 없는 다른 결과만 나오겠지요.”궁이와 엽문은 한동안 바둑을 두며 무예를 겨루기도 했다. 이때의 장쯔이는 처연하고 서글픈 비련의 여인 역을 톡톡히 해낸다. 그녀의 얼굴은 평생 약간 앳돼 보이는 이미지인데 <일대종사>에서의 죽어가는 여자를 연기하는 데 있어 약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걸 장쯔이는 타오를 만큼 붉게 칠한 입술과 파리할 만큼 창백한 작은 얼굴로 나와 이제 곧 궁이가 아니라 장쯔이 자신까지 죽음 직전에 내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여배우는 천재적인 감독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 왕자웨이와는 진작에 <2046>에서 만나 연기 혼을 불태운 적이 있다. <2046>은 <화양연화>의 후속작 같은 작품이었는데 거기서 주인공 남자 차우(양조위)는 수리 여사(장만옥)와 헤어진 후 캄보디아에서 헤매다 돌아와, 그녀와 머물렀던 호텔의 2046호에서 무협 소설을 쓰며 살려고 하지만, 2046호에서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미미란 여자가 살해된다.) 어쩔 수 없이 2047호에 묵게 되는데, 그 옆 방에 사는 고급 창녀가 바이 링이고 그게 장쯔이이다. 장쯔이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베드신과 섹스신을 펼친다. 그건 양조위도 마찬가지이다. 한바탕 일을 끝낸 후 흐드러진 침대 위에서 반라로 누운 채 바이 링, 장쯔이는 차우, 양조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짐승!” 그건 사랑의 밀어였다. 이 영화에서 장쯔이는 섹시미가 철철 넘친다.장쯔이는 작품 활동 초기에 장이머우(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얼터 에고, 분신(分身)과 같은 배우였다. 장쯔이는 장이머우 영화 <집으로 가는 길>로 시작해 <영웅 : 천하의 시작>과 <연인>까지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장쯔이의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출세작인 <와호장룡>도 장이머우가 앙 리(이안·李安)감독에게 소개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영웅 : 천하의 시작>은 르 몽드인지 르 피가로인지, 프랑스 언론에서 "장이머우가 정치적으로 변절했다"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영웅 : 천하의 시작>에는 은모장천(견자단)과 파검(양조위), 비설(장만옥), 무명(이연걸) 등 4명의 검객이 나오는데 모두 통일국가 진나라의 압제자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다. 한명 한명 그 대의를 위해 희생해 가는데, 결국 중국 제일검이었던 파검은 십보필살기법이라는 절대적 살수를 지닌 무명에게 진시황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한다. 농민들이 이제는 적어도 전쟁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지 않느냐고 그는 말한다. 르 몽드인지 르 피가로인지는 이 대목을 장이머우가 중국공산당 체제를 수용하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봤다. 공산당이 진시황처럼 독재자이지만 그래도 인민을 먹여 살리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 이후 장이머우는 당 서열 고위직에 오르는가 하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맡기도 한다.장쯔이는 <영웅 : 천하의 시작>에서 검객 파검을 사랑하는 여인 여월이었다. 파검에게는 이미 날카로운 초식(招式)을 지닌 여검객 비설이 연인으로 자리하고 있음에도 여월은 남자의 또 다른 애인, 첩이 되겠다며 막무가내식 순애보를 펼친다. 비설은 파검이 대의를 위하지 않으면 헤어질 태세이지만 여월은 파검이 대의보다는 자신을 안아 주기를 바란다. 파검이 비설의 칼에 죽은 후 오열하는 여월, 장쯔이의 모습은 영화와 감독이 시대와 체제에 어떻게 타협하고 굴복했든 그런 거 상관없이 가슴 짠한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이념이고 나발이고 사랑은 늘 최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공산당도 자본가도 못 말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중국 최고 흥행 감독으로 분류되는 펑 샤오강(馮小剛, 그가 지금까지 모은 관객 수는 중국 인구 사이즈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집결호>같은 전쟁영화가 대표작.)의 2006년 작 <야연>에서 장쯔이는 완이란 이름의 황후로 나온다. 완은 시동생 리와 짜고 남편인 황제를 죽인 후 다시 자신이 죽인 남편의 아들인 우 루안(다니엘 우)과 새 황제를 시해할 계획을 세운다. 황후 완과 황태자 우 루안은 계모와 의붓아들 관계로 어릴 때 사랑하는 사이였다.그러나 황후 완은 돌발적 선택을 한다. 사랑도 좋지만, 권력이 더 좋아진 여인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젊은 연인마저 죽음으로 내몰고 차제에 아예 황제 자리를 차지한다. <야연>은 명백히 ‘햄릿’을 중국식으로 번안한 작품이었다. 장쯔이는 여기서, 저렇게 청순한 척하는 여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검은 구름의 야심이 숨어 있는가를 연기해 낸다. 역시 권력과 돈을 가진 여자는,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인간이라는 점을 주의하게 만든다.장쯔이는 2016년 영화 <태평륜>으로 이걸 만든 홍콩 출신의 전설적 감독 오우삼과 함께 내리막을 걸었다. 오우삼은 다시 예전의 영광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에는 송혜교도 출연했는데 왜 그런 캐스팅을 했는지, 감독이 자신의 취향만으로 캐스팅을 해도 되는지, 비난을 샀다. 오우삼만큼은 아니지만, 장쯔이 역시 <태평륜> 이후 이렇다 할 수작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장쯔이의 필모그래피 중에 개인적으로 궁금한 작품은 2009년 할리우드에서 만든 엽기적인 미스터리 영화 <호스맨>이다. 장쯔이는 여기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훔쳐 간 살인마 크리스틴으로 나온다. 그런 그녀를 형사 에이단(데니스 퀘이드)이 취조를 맡는다. 끔찍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이 영화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내 미개봉작이다.이미 한물간 배우가 되고있는 장쯔이로서는 후회가 없다는 얘기도 다 하는 말일 뿐일 것이다. 왜 후회가 없겠는가. 그러나 인생은 바둑판이다. 그저 매번 다른 결과만이 나올 뿐이다. 인기란 다 부질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명멸하는 영화 속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장쯔이는 그런 편린의 기억이 넘쳐나는 배우이다.오동진 영화평론가
조성진이 라벨 곡들만으로 리사이틀을 한다니! 지난 2월 임윤찬 도쿄 리사이틀을 다녀온 뒤 이 스케줄을 알게 됐다. 다시 도쿄행 비행기표를 끊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에서 미셸 베로프를 사사한 조성진은 베토벤, 슈베르트,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등으로 레퍼토리를 넓혀왔다. 조성진만의 개성을 담은 좋은 연주들이었지만 독일이나 러시아 등의 음악은 다른 대안들도 많은 반면, 프랑스 레퍼토리라면 역시 조성진으로 들어보고 싶었다. 드뷔시와 달리 라벨의 곡들은 아직 음반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더더욱 실연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12일(수) 도쿄 산토리 홀 리사이틀이 가기엔 더 편했겠지만 11일(화) 뮤자 가와사키(MUZA Kawasaki) 홀에서의 리사이틀을 선택했다. 산토리 홀은 라벨 반-리스트 반이었고, 가와사키 프로그램은 전부 라벨 곡이었기 때문이다. 뮤자 가와사키 심포니 홀의 음향이 궁금하기도 했다. (외국인으로서 표를 예매하고 찾는 과정에는 곡절이 좀 있었다.)“생긴대로 논다”는 말이 있다. 일반적 용례에선 별로 좋게 쓰이는 말은 아닌데,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로 들리는 연주(play)의 느낌이 통한다고 영어로 생각해 보면 얼추 맞는 말이다. 연주자의 외양에는 소리를 만드는 물리적 토대로서의 신체 구조뿐 아니라 내면적인 성격과 기질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날 조성진의 연주는 아주 좋은 의미에서 “생긴 대로” 였다. 무대로 성큼성큼 나오는 조성진은 그야말로 “물찬 제비” 같았다. 날렵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 피아노에 앉기도 전부터 뿜어져 나왔는데, 과연 첫 곡 연주부터 그러했다. 첫 곡은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 (Serenade grotesque)>. 재즈적 요소도 느껴지고 현대음악 느낌도 나고…세레나데치고는 과연 꽤 기괴한(?) 곡이었다. 조성진은 이런 다양한 요소를 아주 깔끔하고 민첩하게 요리해냈다.<고풍스러운 미뉴에트>와 <소나티네>를 지나 <거울(Miroirs)>. 본격적으로 조성진 표 라벨 연주의 특질들이 두드러졌다. ‘바다 위의 작은 배(Une barque sur l’ocean)’는 작은 악구들의 아티큘레이션, 각 소절의 프레이징 모두 깔끔하면서도 음악적으로 잘 표현되었고, 운동감도 뛰어났다. ‘알보라다 델 그라치오소’ 역시 날렵하고 리드미컬한 표현이 일품이었다. 후기를 적은 메모를 들춰보니 계속 나오는 표현이 ‘깔끔하다’, ‘유려하다’, ‘우아하다’ ‘날렵하다’, ‘정교하다’…이런 형용사들이다. 큰 소리를 내야 하는 부분에서도 거칠지 않았다. 포르티시모를 때릴 듯한 모션에서도 마지막 찰나에 힘을 잘 갈무리해서 아름다운 울림으로 소리를 다듬어냈다.<밤의 가스파르>는 그런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연주였다. 1곡 온딘(Ondine)은 듣던 중 가장 유려하고 세련된 편에 속했다. 3곡 ‘스카르보(Scarbo, 짓궂은 도깨비)’는 예술의 전당에서 다닐 트리포노프가 했던 충격적인 연주와 계속 비교하며 듣게 되었다. 트리포노프가 그려낸 스카르보는 밤길에 마주쳤다간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면, 조성진의 스카르보는 보다 인간적인(?)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구석구석 아주 섬세하게 매만져져 있어서, ‘이 도깨비는 이런 모습이겠군’하고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와 끝 곡인<쿠프랭의 무덤>이 조성진의 스타일에 더 잘 어울려 보였다. 정말로 우아하고 감상적이었고, 분석적이면서도 극적인 연주였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들을 각각의 특성에 맞게 풀어냈다. 활기차고 다이내믹한 부분들도 뛰어났지만, 아주 약하고 가벼운 소리 여러 개의 음영을 겹쳐가며 그림을 그리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올 라벨(All Ravel) 프로그램인데 정규 곡목에 안 들어있었으니 ‘앵콜은 당연히 그거겠지?’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고나왔다. 곡목은 예상했는데, 그렇게까지 아름다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완벽했다. 이 곡에 대한 나의 이상을 충족시켜주었다. ‘아…이렇게 쳐버리고 나면 다음에 뭘 더 칠 수가 없잖아’ 하는 생각에 야속한 마음까지 들었다. 2월 임윤찬 도쿄 리사이틀 때와는 달리, 가와사키에는 한국에서 온 관객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옆에는 5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일본 여성들이 앉아있었는데, 그들의 대화 중 알아들을 수 있는 고유명사들로 짐작건대 상당한 수준의 마니아임이 분명했다. 곡 하나가 끝나고 조성진이 일어나 인사할 때마다 “스고이~~!” “스바라시이!”를 연발하던 이분들, 결국 파반느가 끝나자 “우와아”하는 환호성과 함께 기립박수를 쳤다. 이분들 외에도 많은 일본 관객들의 기립박수 속에, 조성진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며 퇴장했다. 뮤자 가와사키 심포니 홀 내부는 마치 대왕조개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줬다. 딱 적당한 규모에, 소리를 잘 가두어서 어느 자리에서나 잘 들을 수 있게 해줄 것 같은 인상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3층 약간 오른쪽에 앉았는데, 피아노 건반을 누른 채 손을 움직였을 때 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그 섬세한 울림까지 오롯이 전달되었다. 나는 피아노 소리가 홀에서 울리는 모습을 공기 중에 꽃이 피는 것으로 묘사하곤 한다. 뮤자 가와사키 홀은 플레트네프와 임윤찬의 리사이틀을 들었던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과는 또 달랐다. (그 홀도 음향 정말 좋다)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이 공기 중에 장미를 피워냈다면, 뮤자 가와사키 홀은 매화를 피워내는 느낌이었다. 이현식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