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후회겠지만 그래도 늘 나만의 연인 같은 배우 장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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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 장쯔이
장쯔이(장자이·章子怡)는 마흔다섯이고, 언제부턴가 우리에겐 사라진 여인이 됐지만, 여전히 중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이며, 무엇보다 잊을 수 없게 하는 영화와 영화 장면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는 여인이다. 다수의 영화에서 그녀는 정말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이제 기억조차 안 하겠지만, 그리고 애당초 잘 알지도 못했겠지만, 장동건, 장바이즈(장백지·張柏芝), 장쯔이가 동시에 나왔던 한국 홍콩 중국 합작 영화 <위험한 관계>에서 그녀는 일생일대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이 한·중 홍콩영화 <위험한 관계>는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쓴 18세기 동명 소설을, 왜 그렇게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지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것 중의 하나인 작품이다.
1959년 로제 바딤 감독이 잔 모로를 주연으로 내세워 영화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영국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이 존 말코비치, 미셸 파이퍼, 글렌 클로즈를 주연으로 해 영화로 만들었다. 1989년에는 폴란드 출신 밀로스 포먼이 <발몽>이란 제목으로, 1999년에는 라이언 필립, 리즈 위더스푼의 영화 <크루얼 인텐션>이란 제목의 영화로, 2003년에는 한국의 이재용 감독이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란 사극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다시 허진호 감독이 2012년에 장쯔이, 장바이즈, 장동건 주연의 원제 그대로의 영화 <위험한 관계>로 만들었다. 아 복잡해. 허진호의 영화는 1988년 스티븐 프리어즈 판을 1930년대의 상하이를 무대로 재해석해낸 작품이고, 미끈하고 수려한 작품이었음에도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뒷얘기에 따르면 장쯔이는 만다린을 구사하는 배우였으며, 장바이즈는 광둥어로, 장동건은 만다린을 한글로 음을 옮겨 그것을 외워서 했다고 한다. 허진호 본인은 만다린도 광둥어도 할 줄 몰랐는데 신기하게도 영화는 제대로 만들어졌다. 비 중국어권 관객인 한국에서는 크게 어색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언어 문제가 흥행에서 가장 큰 약점으로 작동했던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더욱더 연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예컨대 실내 화원에서의 장쯔이, 장동건의 키스신이 그런 것이었다. 희대의 플레이보이 세이판(장동건)이 신여성 모지에위(장바이즈)와의 내기 때문에 정숙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세이판은 어떻게든 뚜펀위와 키스하려 하고, 뚜펀위는 계속 그를 밀어내다가 화원에서의 밀회를 계기로 드디어 입술을 허락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이때는 세이판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키스를 멈춘다.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이려는 여자, 그 부정(不貞)을 시작하려는 여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그건 공포의 희열 같은 것, ‘나는 이제 무너질 거야’라는 일탈의 작정 같은 심정인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장쯔이의 온몸 연기는 실로 잊혀지지가 않는다.
플레이보이라면 이런 순정파 여자를 잘못 건드리는 순간 자신이 이제 정착남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세이판이 머뭇거리는 것은 그 때문이고 이 일 때문에 그녀는 다시 그에게 문을 닫아거는데 폐렴으로 죽어가는 세이판이 잘못을 깨닫고 그녀가 사는 방문을 두드리지만, 여자는 그 안에서 문을 막아선 채 흐느낀다. 장쯔이는 온몸을 던져 명품 연기를 펼쳤다. 뛰어난 감정 연기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작품이었지만 당시의 신세대 감독들은 신파의 레트로 감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게다가 2008년 이후 장쯔이는 불륜과 금융사기 등으로 스캔들이 이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영화는 참으로 이런저런 일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의 운명은 실로 시어머니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이다. 2013년에 발표된 왕자웨이(왕가위·王家衛) 감독의 <일대종사>에서도 장쯔이는 실제로 일대종사의 명연기를 펼친다. 한때 무예 명문가의 딸이었고 한 시대를 이끌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스러져가는 시대의 모습처럼 아편과 시한부의 질병으로 죽어가는 여인 궁이 역할이었다. 궁이는 자신이 흠모했던 남자 엽문(양조위)과 마지막으로 마주 앉는다. 궁이는 말한다. “살면서 후회가 없다는 말, 그거 다 하는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 후회한들 그 후회도 다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인생은 바둑과 같아요. 바둑처럼 매번 알 수 없는 다른 결과만 나오겠지요.” 궁이와 엽문은 한동안 바둑을 두며 무예를 겨루기도 했다. 이때의 장쯔이는 처연하고 서글픈 비련의 여인 역을 톡톡히 해낸다. 그녀의 얼굴은 평생 약간 앳돼 보이는 이미지인데 <일대종사>에서의 죽어가는 여자를 연기하는 데 있어 약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걸 장쯔이는 타오를 만큼 붉게 칠한 입술과 파리할 만큼 창백한 작은 얼굴로 나와 이제 곧 궁이가 아니라 장쯔이 자신까지 죽음 직전에 내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배우는 천재적인 감독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 왕자웨이와는 진작에 <2046>에서 만나 연기 혼을 불태운 적이 있다. <2046>은 <화양연화>의 후속작 같은 작품이었는데 거기서 주인공 남자 차우(양조위)는 수리 여사(장만옥)와 헤어진 후 캄보디아에서 헤매다 돌아와, 그녀와 머물렀던 호텔의 2046호에서 무협 소설을 쓰며 살려고 하지만, 2046호에서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미미란 여자가 살해된다.) 어쩔 수 없이 2047호에 묵게 되는데, 그 옆 방에 사는 고급 창녀가 바이 링이고 그게 장쯔이이다. 장쯔이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베드신과 섹스신을 펼친다. 그건 양조위도 마찬가지이다. 한바탕 일을 끝낸 후 흐드러진 침대 위에서 반라로 누운 채 바이 링, 장쯔이는 차우, 양조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짐승!” 그건 사랑의 밀어였다. 이 영화에서 장쯔이는 섹시미가 철철 넘친다. 장쯔이는 작품 활동 초기에 장이머우(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얼터 에고, 분신(分身)과 같은 배우였다. 장쯔이는 장이머우 영화 <집으로 가는 길>로 시작해 <영웅 : 천하의 시작>과 <연인>까지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장쯔이의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출세작인 <와호장룡>도 장이머우가 앙 리(이안·李安)감독에게 소개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웅 : 천하의 시작>은 르 몽드인지 르 피가로인지, 프랑스 언론에서 "장이머우가 정치적으로 변절했다"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영웅 : 천하의 시작>에는 은모장천(견자단)과 파검(양조위), 비설(장만옥), 무명(이연걸) 등 4명의 검객이 나오는데 모두 통일국가 진나라의 압제자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다. 한명 한명 그 대의를 위해 희생해 가는데, 결국 중국 제일검이었던 파검은 십보필살기법이라는 절대적 살수를 지닌 무명에게 진시황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한다. 농민들이 이제는 적어도 전쟁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지 않느냐고 그는 말한다. 르 몽드인지 르 피가로인지는 이 대목을 장이머우가 중국공산당 체제를 수용하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봤다. 공산당이 진시황처럼 독재자이지만 그래도 인민을 먹여 살리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 이후 장이머우는 당 서열 고위직에 오르는가 하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맡기도 한다.
장쯔이는 <영웅 : 천하의 시작>에서 검객 파검을 사랑하는 여인 여월이었다. 파검에게는 이미 날카로운 초식(招式)을 지닌 여검객 비설이 연인으로 자리하고 있음에도 여월은 남자의 또 다른 애인, 첩이 되겠다며 막무가내식 순애보를 펼친다. 비설은 파검이 대의를 위하지 않으면 헤어질 태세이지만 여월은 파검이 대의보다는 자신을 안아 주기를 바란다. 파검이 비설의 칼에 죽은 후 오열하는 여월, 장쯔이의 모습은 영화와 감독이 시대와 체제에 어떻게 타협하고 굴복했든 그런 거 상관없이 가슴 짠한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이념이고 나발이고 사랑은 늘 최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공산당도 자본가도 못 말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 흥행 감독으로 분류되는 펑 샤오강(馮小剛, 그가 지금까지 모은 관객 수는 중국 인구 사이즈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집결호>같은 전쟁영화가 대표작.)의 2006년 작 <야연>에서 장쯔이는 완이란 이름의 황후로 나온다. 완은 시동생 리와 짜고 남편인 황제를 죽인 후 다시 자신이 죽인 남편의 아들인 우 루안(다니엘 우)과 새 황제를 시해할 계획을 세운다. 황후 완과 황태자 우 루안은 계모와 의붓아들 관계로 어릴 때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황후 완은 돌발적 선택을 한다. 사랑도 좋지만, 권력이 더 좋아진 여인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젊은 연인마저 죽음으로 내몰고 차제에 아예 황제 자리를 차지한다. <야연>은 명백히 ‘햄릿’을 중국식으로 번안한 작품이었다. 장쯔이는 여기서, 저렇게 청순한 척하는 여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검은 구름의 야심이 숨어 있는가를 연기해 낸다. 역시 권력과 돈을 가진 여자는,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인간이라는 점을 주의하게 만든다. 장쯔이는 2016년 영화 <태평륜>으로 이걸 만든 홍콩 출신의 전설적 감독 오우삼과 함께 내리막을 걸었다. 오우삼은 다시 예전의 영광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에는 송혜교도 출연했는데 왜 그런 캐스팅을 했는지, 감독이 자신의 취향만으로 캐스팅을 해도 되는지, 비난을 샀다. 오우삼만큼은 아니지만, 장쯔이 역시 <태평륜> 이후 이렇다 할 수작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장쯔이의 필모그래피 중에 개인적으로 궁금한 작품은 2009년 할리우드에서 만든 엽기적인 미스터리 영화 <호스맨>이다. 장쯔이는 여기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훔쳐 간 살인마 크리스틴으로 나온다. 그런 그녀를 형사 에이단(데니스 퀘이드)이 취조를 맡는다. 끔찍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이 영화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내 미개봉작이다. 이미 한물간 배우가 되고있는 장쯔이로서는 후회가 없다는 얘기도 다 하는 말일 뿐일 것이다. 왜 후회가 없겠는가. 그러나 인생은 바둑판이다. 그저 매번 다른 결과만이 나올 뿐이다. 인기란 다 부질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명멸하는 영화 속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장쯔이는 그런 편린의 기억이 넘쳐나는 배우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1959년 로제 바딤 감독이 잔 모로를 주연으로 내세워 영화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영국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이 존 말코비치, 미셸 파이퍼, 글렌 클로즈를 주연으로 해 영화로 만들었다. 1989년에는 폴란드 출신 밀로스 포먼이 <발몽>이란 제목으로, 1999년에는 라이언 필립, 리즈 위더스푼의 영화 <크루얼 인텐션>이란 제목의 영화로, 2003년에는 한국의 이재용 감독이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란 사극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다시 허진호 감독이 2012년에 장쯔이, 장바이즈, 장동건 주연의 원제 그대로의 영화 <위험한 관계>로 만들었다. 아 복잡해. 허진호의 영화는 1988년 스티븐 프리어즈 판을 1930년대의 상하이를 무대로 재해석해낸 작품이고, 미끈하고 수려한 작품이었음에도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뒷얘기에 따르면 장쯔이는 만다린을 구사하는 배우였으며, 장바이즈는 광둥어로, 장동건은 만다린을 한글로 음을 옮겨 그것을 외워서 했다고 한다. 허진호 본인은 만다린도 광둥어도 할 줄 몰랐는데 신기하게도 영화는 제대로 만들어졌다. 비 중국어권 관객인 한국에서는 크게 어색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언어 문제가 흥행에서 가장 큰 약점으로 작동했던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더욱더 연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예컨대 실내 화원에서의 장쯔이, 장동건의 키스신이 그런 것이었다. 희대의 플레이보이 세이판(장동건)이 신여성 모지에위(장바이즈)와의 내기 때문에 정숙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세이판은 어떻게든 뚜펀위와 키스하려 하고, 뚜펀위는 계속 그를 밀어내다가 화원에서의 밀회를 계기로 드디어 입술을 허락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이때는 세이판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키스를 멈춘다.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이려는 여자, 그 부정(不貞)을 시작하려는 여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그건 공포의 희열 같은 것, ‘나는 이제 무너질 거야’라는 일탈의 작정 같은 심정인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장쯔이의 온몸 연기는 실로 잊혀지지가 않는다.
플레이보이라면 이런 순정파 여자를 잘못 건드리는 순간 자신이 이제 정착남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세이판이 머뭇거리는 것은 그 때문이고 이 일 때문에 그녀는 다시 그에게 문을 닫아거는데 폐렴으로 죽어가는 세이판이 잘못을 깨닫고 그녀가 사는 방문을 두드리지만, 여자는 그 안에서 문을 막아선 채 흐느낀다. 장쯔이는 온몸을 던져 명품 연기를 펼쳤다. 뛰어난 감정 연기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작품이었지만 당시의 신세대 감독들은 신파의 레트로 감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게다가 2008년 이후 장쯔이는 불륜과 금융사기 등으로 스캔들이 이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영화는 참으로 이런저런 일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의 운명은 실로 시어머니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이다. 2013년에 발표된 왕자웨이(왕가위·王家衛) 감독의 <일대종사>에서도 장쯔이는 실제로 일대종사의 명연기를 펼친다. 한때 무예 명문가의 딸이었고 한 시대를 이끌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스러져가는 시대의 모습처럼 아편과 시한부의 질병으로 죽어가는 여인 궁이 역할이었다. 궁이는 자신이 흠모했던 남자 엽문(양조위)과 마지막으로 마주 앉는다. 궁이는 말한다. “살면서 후회가 없다는 말, 그거 다 하는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 후회한들 그 후회도 다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인생은 바둑과 같아요. 바둑처럼 매번 알 수 없는 다른 결과만 나오겠지요.” 궁이와 엽문은 한동안 바둑을 두며 무예를 겨루기도 했다. 이때의 장쯔이는 처연하고 서글픈 비련의 여인 역을 톡톡히 해낸다. 그녀의 얼굴은 평생 약간 앳돼 보이는 이미지인데 <일대종사>에서의 죽어가는 여자를 연기하는 데 있어 약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걸 장쯔이는 타오를 만큼 붉게 칠한 입술과 파리할 만큼 창백한 작은 얼굴로 나와 이제 곧 궁이가 아니라 장쯔이 자신까지 죽음 직전에 내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배우는 천재적인 감독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 왕자웨이와는 진작에 <2046>에서 만나 연기 혼을 불태운 적이 있다. <2046>은 <화양연화>의 후속작 같은 작품이었는데 거기서 주인공 남자 차우(양조위)는 수리 여사(장만옥)와 헤어진 후 캄보디아에서 헤매다 돌아와, 그녀와 머물렀던 호텔의 2046호에서 무협 소설을 쓰며 살려고 하지만, 2046호에서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미미란 여자가 살해된다.) 어쩔 수 없이 2047호에 묵게 되는데, 그 옆 방에 사는 고급 창녀가 바이 링이고 그게 장쯔이이다. 장쯔이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베드신과 섹스신을 펼친다. 그건 양조위도 마찬가지이다. 한바탕 일을 끝낸 후 흐드러진 침대 위에서 반라로 누운 채 바이 링, 장쯔이는 차우, 양조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짐승!” 그건 사랑의 밀어였다. 이 영화에서 장쯔이는 섹시미가 철철 넘친다. 장쯔이는 작품 활동 초기에 장이머우(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얼터 에고, 분신(分身)과 같은 배우였다. 장쯔이는 장이머우 영화 <집으로 가는 길>로 시작해 <영웅 : 천하의 시작>과 <연인>까지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장쯔이의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출세작인 <와호장룡>도 장이머우가 앙 리(이안·李安)감독에게 소개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웅 : 천하의 시작>은 르 몽드인지 르 피가로인지, 프랑스 언론에서 "장이머우가 정치적으로 변절했다"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영웅 : 천하의 시작>에는 은모장천(견자단)과 파검(양조위), 비설(장만옥), 무명(이연걸) 등 4명의 검객이 나오는데 모두 통일국가 진나라의 압제자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다. 한명 한명 그 대의를 위해 희생해 가는데, 결국 중국 제일검이었던 파검은 십보필살기법이라는 절대적 살수를 지닌 무명에게 진시황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한다. 농민들이 이제는 적어도 전쟁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지 않느냐고 그는 말한다. 르 몽드인지 르 피가로인지는 이 대목을 장이머우가 중국공산당 체제를 수용하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봤다. 공산당이 진시황처럼 독재자이지만 그래도 인민을 먹여 살리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 이후 장이머우는 당 서열 고위직에 오르는가 하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맡기도 한다.
장쯔이는 <영웅 : 천하의 시작>에서 검객 파검을 사랑하는 여인 여월이었다. 파검에게는 이미 날카로운 초식(招式)을 지닌 여검객 비설이 연인으로 자리하고 있음에도 여월은 남자의 또 다른 애인, 첩이 되겠다며 막무가내식 순애보를 펼친다. 비설은 파검이 대의를 위하지 않으면 헤어질 태세이지만 여월은 파검이 대의보다는 자신을 안아 주기를 바란다. 파검이 비설의 칼에 죽은 후 오열하는 여월, 장쯔이의 모습은 영화와 감독이 시대와 체제에 어떻게 타협하고 굴복했든 그런 거 상관없이 가슴 짠한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이념이고 나발이고 사랑은 늘 최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공산당도 자본가도 못 말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 흥행 감독으로 분류되는 펑 샤오강(馮小剛, 그가 지금까지 모은 관객 수는 중국 인구 사이즈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집결호>같은 전쟁영화가 대표작.)의 2006년 작 <야연>에서 장쯔이는 완이란 이름의 황후로 나온다. 완은 시동생 리와 짜고 남편인 황제를 죽인 후 다시 자신이 죽인 남편의 아들인 우 루안(다니엘 우)과 새 황제를 시해할 계획을 세운다. 황후 완과 황태자 우 루안은 계모와 의붓아들 관계로 어릴 때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황후 완은 돌발적 선택을 한다. 사랑도 좋지만, 권력이 더 좋아진 여인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젊은 연인마저 죽음으로 내몰고 차제에 아예 황제 자리를 차지한다. <야연>은 명백히 ‘햄릿’을 중국식으로 번안한 작품이었다. 장쯔이는 여기서, 저렇게 청순한 척하는 여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검은 구름의 야심이 숨어 있는가를 연기해 낸다. 역시 권력과 돈을 가진 여자는,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인간이라는 점을 주의하게 만든다. 장쯔이는 2016년 영화 <태평륜>으로 이걸 만든 홍콩 출신의 전설적 감독 오우삼과 함께 내리막을 걸었다. 오우삼은 다시 예전의 영광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에는 송혜교도 출연했는데 왜 그런 캐스팅을 했는지, 감독이 자신의 취향만으로 캐스팅을 해도 되는지, 비난을 샀다. 오우삼만큼은 아니지만, 장쯔이 역시 <태평륜> 이후 이렇다 할 수작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장쯔이의 필모그래피 중에 개인적으로 궁금한 작품은 2009년 할리우드에서 만든 엽기적인 미스터리 영화 <호스맨>이다. 장쯔이는 여기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훔쳐 간 살인마 크리스틴으로 나온다. 그런 그녀를 형사 에이단(데니스 퀘이드)이 취조를 맡는다. 끔찍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이 영화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내 미개봉작이다. 이미 한물간 배우가 되고있는 장쯔이로서는 후회가 없다는 얘기도 다 하는 말일 뿐일 것이다. 왜 후회가 없겠는가. 그러나 인생은 바둑판이다. 그저 매번 다른 결과만이 나올 뿐이다. 인기란 다 부질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명멸하는 영화 속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장쯔이는 그런 편린의 기억이 넘쳐나는 배우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