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아파트 주방 모습. 사진=게티이미지
노후 아파트 주방 모습. 사진=게티이미지
빌라와 오피스텔 등 비(非)아파트 전세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고 있습니다. 혹여라도 보증금을 떼이고 전세 사기 피해자로 내몰리진 않을까 걱정하는 세입자가 늘어나면서 빌라·오피스텔과 비슷한 보증금에 얻을 수 있는 노후 아파트로 전세 수요가 옮겨가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노후 아파트 전세를 선택한 세입자들은 삶의 질이 낮아졌다고 토로합니다.

30대 초반 이모씨는 보증금 2억원에 서울 양천구 신정동 신축 오피스텔 전세를 살다가 2022년 비슷한 금액대의 경기 부천시 노후 아파트 전세로 옮겼습니다. 서울 강서구 등지에서 빌라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세 모녀 사건'을 비롯해 전세 사기와 깡통 전세가 점차 늘어나자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깔끔한 신축 오피스텔이었고 걸어서 2~3분이면 지하철역에 닿았다. 집주인도 좋은 분이었다"면서도 "화곡동이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다. 텔레비전만 틀면 옆 동네에서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점차 불안해졌다"고 했습니다.

전세 사기 공포에…서울 신축 오피스텔서 경기 노후 아파트로

불편함이 없던 신축 투룸 오피스텔이었지만, 이씨는 깡통 전세 우려에 비슷한 보증금의 부천시 아파트 전세로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출퇴근 시간을 생각하면 서울 안에 남고 싶었지만, 보증금 규모를 맞추면서 지하철역이 가까운 곳을 찾다 보니 서울 밖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이씨와 같이 오피스텔 전세를 떠나 아파트 전세로 향하는 이들이 늘면서 오피스텔 전·월세 시장은 월세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다방이 올해 1~5월 발생한 전국 오피스텔 전·월세 거래 10만5978건을 분석했더니 66%에 해당하는 6만9626건이 월세였습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 62%였던 월세 비중이 4%포인트(p) 늘었습니다. 이 기간 서울은 61%에서 66%로 5%포인트 증가했습니다.
빌라와 오피스텔이 밀집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 모습. 사진=한경DB
빌라와 오피스텔이 밀집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 모습. 사진=한경DB
이씨는 "마음 같아선 서울 아파트에 살고 싶었지만, 보증금이 두 배 이상 차이 났다"며 "대출받을까도 싶었지만, 이자가 연 4%에 육박해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구한 새 전셋집은 이씨보다 나이가 많은 방 두 개짜리 노후 아파트입니다.

좀 낡았어도 매일 청소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며 지내면 되겠다던 이씨의 생각은 이사 첫 달부터 흔들렸습니다. 퇴근길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입니다. 이씨가 거주하는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리지 않고 멈춰있다가 이내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1층에서는 문이 열렸고, 이씨는 놀란 마음에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이후 관리사무소에서는 별일 아니라는듯 "엘리베이터가 낡아 종종 오작동하니 감안하시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계속됐습니다. 화장실 샤워기 필터는 한 달 만에 새카맣게 변했고 날이 추워지자 나무 재질 창틀에서는 냉기가 스며들었습니다. 창틀에서 습기도 유입돼 집주인에 수선을 요청했지만, 창틀을 바꿀 순 없다며 벽지만 약간 덧바르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상상도 못 하던 문제에 삶의 질 악화…이게 맞나 싶어"

주방 밑에서는 바퀴벌레의 흔적도 종종 발견됩니다. 벌레를 줄이고자 매일 스팀 청소를 하고 곳곳에 약을 쳤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며칠 전 가스레인지 옆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나왔습니다.

이씨는 "어느 날 잠을 자다 갈증에 잠이 깨 물을 마시러 나왔더니 바닥에 꿈틀대는 까만 줄이 그어져 있었다"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그마한 개미 수백마리가 줄을 지어 들어온 것이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청소하고 약을 뿌려도 바퀴벌레에 더해 개미까지 몰려들자 이씨도 마음가짐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창틀에서 습기가 스며들자 벽지를 덧붙인 모습과 주방에서 나온 바퀴벌레를 잡은 모습. 사진=독자제공
창틀에서 습기가 스며들자 벽지를 덧붙인 모습과 주방에서 나온 바퀴벌레를 잡은 모습. 사진=독자제공
그는 "아파트에 벌레가 많아서 그런지 내 집만 매일 청소한다고 안 들어오진 않더라"며 "벌레가 들어올 만한 틈도 너무 많아 어디로 들어올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반년 정도 고생하다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축 오피스텔에 살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문제들"이라며 "예전엔 전세 사기 소식을 접할 때만 무서웠다면 이사 후에는 집에 있는 매일이 공포"라고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이씨는 "가끔 이렇게 지내는 게 맞나 싶다"며 "신축 건물에서 지내다 40년 가까이 된 곳으로 오니 삶의 질이 낮아졌다는 역 체감이 크게 된다"고 토로했습니다.

역 체감에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이유…"마지막 주거 사다리"

하지만 집을 재차 옮기진 않을 생각입니다. 신축 오피스텔로 옮기자니 전세 사기 공포는 여전하고 월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서울 오피스텔 평균 월세는 89만3000원으로 조사됐습니다. 1년 전과 비교해 12.3%(9만8000원) 뛰었습니다. 이씨가 살던 신정동에서는 100만원짜리 월세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지내는 곳보다 여건이 나은 아파트는 전셋값이 부담입니다. 비아파트 전세 수요가 아파트로 몰려드는 반면, 공급은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부동산원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에서 올해 1~5월 전국 아파트 전셋값은 0.54% 올랐습니다. 수도권은 1.51%, 서울은 1.58%나 상승했습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당분간 전셋값 상승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씨는 "보증금 떼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월세나 이자로 나가는 돈도 없다"며 "이곳에서 지내며 벌고 아끼는 만큼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예전엔 오피스텔이나 빌라 전세가 주거 사다리였다면 이제는 노후 아파트가 그 역할을 하는 셈"이라며 "서른 중반에는 여자친구와 결혼하려 한다. 당분간은 계속 지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