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직업들에 대한 기억…신간 '어떤 동사의 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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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무렵 영등포에 있는 한 직업소개소. 쌀쌀한 날씨에도 인파로 붐볐다.

상당수의 중년 남자는 난로 앞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일거리도 풍부한 듯 보였다.

실장님이라 불리는 소개소 직원은 전국 방방곡곡 일터의 근무 조건을 꿰고 있었다.

그는 "일 힘들면 너무 고민 말고 다시 와요.

좋은 데 소개해 드릴게"라고 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작가 한승태는 같은 직업소개소를 방문했다.

문전성시는 고사하고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시설은 낙후했고, 직원도 없었다.

소장 홀로 소개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소장은 근래 들어 사람들이 스마트폰 앱으로 일자리를 구하면서 구인 의뢰 건수가 크게 줄었다고 했다.

IT 혁명 속에 오프라인 구인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것이다.

사라지는 직업들에 대한 기억…신간 '어떤 동사의 멸종'
최근 출간된 '어떤 동사의 멸종'은 '퀴닝' '고기로 태어나서'로 주목받은 작가 한승태가 쓴 직업 체험기다.

기술 발달로 머지않아 대체되거나 사라질 직업들의 풍경을 담은 일종의 르포다.

저자는 콜센터 상담, 택배 상하차, 뷔페식당 주방, 빌딩 청소를 직접 체험했다.

모두 직업 대체 확률이 0.96~1(1에 수렴할수록 대체 가능성이 높음)에 이르는, 곧 없어질 직업들이다.

저자는 이들 직업을 직접 경험하며 현장의 실상과 동료 노동자의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을 생동감 있게 전한다.

고객들의 문의나 불만을 전화로 상대해야 하는 콜센터는 극심한 감정노동을 견뎌야 하는 곳이다.

뷔페식당 주방 일도 감정적으로 힘들긴 마찬가지다.

실력 또는 눈치가 없으면 선배들과 동료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때론 40대도 20대에게 호된 질책을 당한다고 한다.

진입장벽이 낮아 비교적 다양한 사람이 드나드는 물류센터 일이나 60대 이상이 주로 근무하는 빌딩 청소도 나름의 애환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라지는 직업들에 대한 기억…신간 '어떤 동사의 멸종'
소멸 위기에 처한 건 이들 직업뿐 아니다.

저자의 본업인 글쓰기 관련 직업도 시대변화로 인해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인공지능(AI)이 몇 초 만에 짧은 소설 정도는 뚝딱 써내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도 일자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닌 세상이 됐다.

"세상은 오늘도 날카로운 한기로 사람들을 몰아세운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리라. 다가오는 시간은 지금보다 아주, 아주 많이 더 추우리라는 사실을."
시대의창. 404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