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줄 알았는데…"엔비디아보다 중요" 뭉칫돈 쏟아진 곳 [노유정의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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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반전 신화 쓰는 원전
인공지능(AI) 붐의 수혜 산업으로 원자력이 떠올랐다. AI 개발 경쟁으로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세계 각국들이 에너지 확보에 주력하고 있어서다. 석탄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인류의 삶을 위협하고 신재생에너지는 아직 안정적인 공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저렴하면서도 전력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원자력은 대안으로 꼽힌다. 탈원전 선두주자였던 유럽을 포함한 주요국들이 친원전 기조로 돌아섰으며 빅테크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원전에 투자하고 있다.
美 빅테크가 주목하는 원자력
지난 16일(현지시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CBS 인터뷰에서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 사업에 수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기업 테라파워가 10일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미국 최초로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실증단지 건설에 착수한 일을 언급하며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를 투입했고 수십억 달러를 더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테라파워는 2008년 게이츠가 탄소 연료를 쓰지 않는 무탄소에너지를 생산한다는 목표로 설립한 기업이다. SMR은 전기 출력량 300MW 이하의 미니 원전으로 대형 원전보다 크기가 훨씬 작아 건설비가 대폭 절감되고 방사능 누출 위험이 적어 ‘차세대 원전’으로 불린다. 와이오밍주에는 물 대신 액체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4세대 SMR 원자로 ‘나트륨’을 만든다. 물을 사용할 때보다 오염수 등 폐기물이 적고 안전성이 높다는 평가다. SK와 SK이노베이션은 2022년 테라파워에 2억5000만달러(당시 약 3000억원)를 투자했다.
빅테크 기업들은 전력 공급을 위해 원자력 발전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미국 발전 및 송전회사 탈렌에너지로부터 100% 원자력으로 가동되는 데이터센터를 지난 3월 인수했다. MS는 챗GPT를 개발한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이 투자한 핵융합 스타트업 헬리온 에너지와 전력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탈원전’ 탈출
최근 수 년간 글로벌 대세는 ‘탈원전’이었다.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발생한 후 원전의 위험성이 다시 대두됐고 유럽을 필두로 글로벌 탈원전 기조가 번졌다.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미국과 유럽이 대러 제재에 나서자 러시아는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대폭 줄였다. 에너지 공급은 줄고 가격은 치솟자 유럽 국가들은 탈원전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50년까지 최대 14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2022년 발표했다. 스웨덴도 향후 20년 동안 원전 10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친원전 기조는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8일 첨단 원전 확대를 지원하는 법안이 초당적인 지지를 받으며 상원을 통과했다. 앞서 백악관은 원자력 산업과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원자력 프로젝트 관리 및 공급 워킹그룹’을 신설한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원전을 금기시하던 일본도 최근 혼슈 다카하마원전 3·4호기 운전 기간을 20년 연장하기로 했다.
배경은 챗GPT다. 생성형 AI 개발에 필수적인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린다. 생성형 AI는 방대한 정보를 학습시키는 과정부터 사용자의 질문을 처리해주는 모든 과정에서 전력을 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챗GPT와 한 번 문답을 할 때 소요되는 전력은 2.9와트시(Wh)로 구글 일반 검색(0.3)의 약 10배다. IEA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2022년 460테라와트시(TWh)에서 2026년 1050TWh로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일본의 연간 전체 전력 소비량 수준이다.
숨통 트인 韓 원전
우리나라는 석유와 가스가 나지 않는 자원 빈국이다. 한 국가가 무리 없이 돌아갈 만큼의 에너지를 항시 확보하는 에너지 안보가 중요한 과제다.원자력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한 번에 만들어내는 발전량이 많고 일정해 석탄과 함께 대표적인 기저전원으로 활용된다. 기저전원은 한 국가에서 24시간 내내 존재하는 최소한의 전력수요를 맞추기 위해 전기를 계속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발전원을 뜻한다. 신재생에너지는 아직 기저전원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햇빛과 바람, 물 등 자연을 이용하는 태양광, 풍력, 수력은 발전량이 들쑥날쑥해서다.
한국은 과거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신흥 강자로 통했다. 2009년 프랑스와 미국을 제치고 아랍에미리트(UAE)의 400억달러(당시 약 47조원) 규모 원전 수주를 따내기도 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2012년 세계 최초로 SMR ‘스마트’의 표준설계인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 원전 산업은 직격탄을 입었다. 신규 원전을 짓지 않고, 기존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지 않자 우수 인력들이 유출되고 원전 생태계가 파괴됐다.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정책 폐기 및 원전 생태계 복원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총괄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실무안’에는 신규 원전 4기(SMR 1기 포함) 건설 계획이 포함됐다. 원전 신규 건설 제안은 2015년 이후 9년 만에 처음이다.
원전 수출도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한수원은 2022년 3조원 규모의 이집트 엘다바 원전 건설 사업을 따냈다. 2009년 UAE 수주 이후 13년 만의 대규모 원전 수출이었다. 지난해 수주한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원전 삼중수소 제거설비 사업은 이달 첫 삽을 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최근 미국 최대 SMR 설계 기업인 뉴스케일파워가 IT 인프라 기업인 스탠더드파워와 50조원 규모의 SMR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주가가 뛰었다. 두산이 앞서 뉴스케일파워에 1억400만달러를 투자하며 이 회사가 수주하는 프로젝트에 핵심 부품을 납품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뉴스케일파워는 2029년부터 스탠더드파워에 SMR 24기를 공급할 계획이다.
또다른 대형 원전 수주 기대도 커지고 있다. 체코 정부는 1200㎿ 규모 원전을 최대 4기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약 30조원 규모의 대규모 프로젝트로, 한국은 프랑스와 2파전을 벌이고 있다. 한수원을 중심으로 두산에너빌리티 등이 뭉쳤다. 체코 정부는 7월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 후 연말께 최종 사업자를 확정한다.
기획·진행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촬영 이종석 PD 디자인 이지영·박하영
편집 이종석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