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제조사들이 웨이퍼(반도체 제조용 실리콘판) 생산을 대거 늘리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추가 제재에 대비해 반도체 ‘자급자족’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시장에선 중국발 공급과잉에 따른 반도체 가격 하락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웨이퍼 30%, 中이 생산

"해볼테면 해봐" 잔뜩 뿔난 중국…'이것' 미친듯이 사들였다
21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들의 올해 웨이퍼 생산량이 월간 890만 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전년 대비 15% 늘어난 수치다. 내년 웨이퍼 생산량은 올해보다 14% 더 늘어난 1010만 장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이는 같은 기간 세계 평균 성장세인 6~7%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중국 반도체 제조사들의 생산력 증대로 중국은 2025년 글로벌 웨이퍼 총 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이 반도체 생산 능력을 키우는 것은 미국의 수출 통제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수출통제 수위를 잇따라 높이면서 대중국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중국 최대 반도체 업체인 SMIC를 비롯해 화훙반도체, 넥스칩, SiEn, 창신테크놀로지 등 중국 업체들은 반도체 생산을 크게 늘리고 있다는 게 SEMI의 진단이다.

SEMI는 또 중국이 자동차나 가전제품에 사용되는 구형 반도체 수요에 부응하고자 파운드리 생산력 증강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투자에 힘입어 중국 1위 파운드리 업체 SMIC는 지난 1분기에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5위에서 3위로 뛰어올랐다. 지난 1분기 SMIC는 17억50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 분기보다 4.3% 늘어난 수치다. 중국 2위 파운드리 업체인 화훙반도체도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6위까지 끌어올리면서 빅5 진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집적회로(IC) 국산화와 중국 스마트폰 신형 제품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구동칩(DDI) 등에서 강한 수요가 있다”며 “2분기에도 중국 업체들의 선전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공급과잉 우려돼”

중국 반도체 제조사들은 지난해 반도체 제조장비도 대거 사들였다. 중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반도체 장비 수입이 15% 줄어든 가운데 중국의 장비 구매가 도드라졌다.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트의 보리스 메토디에브는 최근 온라인 세미나에서 “지난해 반도체 웨이퍼 공장 장비 판매는 전 세계적으로는 1% 늘었지만 중국에선 48% 폭증했다”며 “사실상 중국 업체들의 반도체 장비 사재기 현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과거 중국은 필요한 반도체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가 이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반도체 자립은 중국이 미국의 제재를 이겨내기 위한 필수조건이 됐다. 중국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은 전년보다 10.8% 줄어든 4795억 개의 IC를 수입했다. 수입액은 전년 대비 15.4% 감소한 3494억달러였다. 수입이 줄어든 만큼 자체 생산을 늘렸다는 의미다.

이런 반도체 자급자족 추세에 SMIC와 YMTC 같은 업체가 최대 혜택을 받고 있다고 SCMP는 전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지난주 보고서에서 화훙반도체의 공장 가동률이 최고치에 이르렀으며, 올 하반기에는 가격을 10% 인상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트렌드포스도 지난 19일 보고서에서 높은 수요 덕에 중국 파운드리 업체들의 생산라인이 전면 가동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도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산업 육성 펀드인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은 지난달 3440억위안(약 64조6720억원) 규모의 3차 펀드 조성을 마무리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반도체 투자기금이다.

중국의 반도체 생산력 강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반도체 공급과잉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회계·컨설팅 기업 KPMG가 최근 발간한 ‘2024 글로벌 반도체산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기업 경영진의 75%는 반도체 공급과잉이 이미 존재하거나 4년 내 공급과잉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

베이징=이지훈 특파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