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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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장거리 여행은 대한항공 아니면 아시아나항공이었는데, 이제는 저비용항공사(LCC)로 미국 유럽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내 돈 내고 가는 여행이니 티켓 값이 훨씬 저렴한 LCC에 먼저 눈이 가네요.”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여행을 다녀온 직장인 김모씨(34)는 에어프레미아 티켓을 끊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가격에 눈이 갔다. 에어프레미아 왕복 티켓 값은 124만원으로, 아시아나항공(174만원)보다 50만원 저렴했다. 두 번째는 서비스다. 에어프레미아의 이코노미석 간격은 83~89㎝로, 아시아나항공(83~86㎝)보다 넓다. 기내식도 나온다. 무료 주류 제공 등 몇몇 서비스만 빼면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美·유럽 등 장거리 시장도 진출, 폭발적 성장 … 'LCC 전성시대'
국내 LCC 이용객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다양한 서비스보다 저렴한 가격을 항공권 구매의 주요인으로 삼는 여행객이 늘어서다. 올해 처음 ‘LCC 이용객 3000만 명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4일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올해 1~5월 LCC 국제선 탑승객은 1273만 명에 달했다. 같은 기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대형항공사(FSC) 이용객(1180만 명)보다 많았다. LCC 승객 수는 올해 1~4월 1000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국내에 첫 LCC가 설립된 2003년 이후 최단기간 1000만 명 돌파다.

○‘한국형 LCC 모델’로 승부

업계에서는 ‘LCC 전성시대’가 온 이유로 △저렴한 가격 △확대된 노선 △서비스·정비 등의 거부감 감소 등을 꼽았다. ‘이 정도 가격이면 부족한 서비스를 감내할 수 있다’ ‘국내 LCC는 해외 LCC처럼 불편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아졌다는 얘기다. 동일 노선 기준으로 LCC 티켓 가격은 FSC에 비해 20~30%가량 저렴하다. 한국형 LCC는 해외 LCC와 다르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충성 고객을 붙잡기 위해 멤버십 제도도 운용한다. 제주항공 티웨이항공 진에어 등이 대표적인 LCC다. 이들 기업은 마일리지로 구매할 수 있는 항공권 수량에 제한을 두는 FSC와 달리 언제든지 포인트로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 덕분에 제주항공의 500만 명 회원 중 12%는 재구매 고객이다.
美·유럽 등 장거리 시장도 진출, 폭발적 성장 … 'LCC 전성시대'
국내 LCC들이 처음부터 서비스에 신경 쓴 것은 아니다. 해외 LCC처럼 가격 하나만 봤다. 좌석 간격을 좁히고, 각종 서비스를 없애는 식으로 아낀 비용을 티켓 값을 낮추는 데 썼다.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국내선을 이런 식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국내선 시장을 ‘LCC 천하’로 만들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단기간 국내 항공사가 급증하면서 모든 서비스에 추가 비용을 붙이는 해외 LCC와 달리 기본 서비스를 주는 ‘한국형 LCC’ 사업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며 “한국은 LCC산업에 새로운 ‘테스트베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인구 5000만 명 시장에 LCC가 9개나 있다 보니 서비스 경쟁에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한국 LCC 수는 미국과 같고, 일본(8곳), 독일(4곳)보다 많다.

LCC의 다음 타깃은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 2~5시간짜리 중거리 시장이었다. 국내선을 통해 한 번 LCC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중거리 노선도 쉽게 받아들였다. 한국~일본 노선의 LCC 점유율은 올 1~2월 기준 65.5%에 달했다. 국내선과 단거리 노선을 점령한 국내 LCC들의 눈은 이제 ‘마지막 퍼즐’인 장거리 노선에 꽂혔다. 에어프레미아는 11일부터 노르웨이(오슬로)로 비행기를 띄웠다. 노르웨이까지 운항하는 국내 항공사 직항은 현재 없다. 이 회사는 이미 미국 LA·뉴욕·샌프란시스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도 비행기를 띄우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하반기 두 대의 대형 항공기가 들어오면 다른 장거리 노선에 취항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2년 12월 호주 노선을 뚫은 티웨이항공은 지난달부터 크로아티아 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항공 주도권 LCC에 넘어갈 것”

업계는 앞으로 국내 항공시장의 주도권이 LCC로 완전히 넘어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이 조만간 완료되면 국내 FSC는 대한항공 한 곳만 남기 때문이다. 티웨이항공은 합병 조건으로 대한항공이 내놓기로 한 유럽 4개 노선(파리, 로마, 바르셀로나, 프랑크푸르트)을 넘겨받기로 했다. 아시아나항공이 매물로 내놓은 화물사업부는 사모펀드를 등에 업은 에어인천이 가져갔다.

일각에선 아시아나항공 계열인 에어서울과 에어부산, 사모펀드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티웨이항공, 에어프레미아, 이스타항공 등이 향후 매물로 나올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LCC업계 1위인 제주항공이 손에 넣으면 규모 면에서 FSC 못지않은 ‘메가 LCC’가 나올 수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겨루던 항공시장 주도권 경쟁은 앞으로 ‘대한항공 대 LCC’ 구도로 재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美 사우스웨스트항공이 LCC의 시초…저렴한 요금 정책이 핵심
2005년 제주항공 이후 9社 체제, 경쟁 심화…'한국형 LCC'로 정착

美·유럽 등 장거리 시장도 진출, 폭발적 성장 … 'LCC 전성시대'
저비용항공사(LCC)가 태어난 곳은 미국 유럽 호주 등 하나같이 땅이 넓어 육상 교통이 어려운 국가였다. ‘Low Cost Carrier’란 이름 그대로 싼값에 이동하는 수단이다. 1967년 미국 텍사스에 본사를 둔 사우스웨스트항공이 최초의 LCC다.

대다수 LCC의 운영 초점은 여전히 가격에 맞춰져 있다. 부가 서비스에는 전부 돈을 물린다. 체크인을 모바일이 아니라 공항 카운터에서 할 때도 그렇고, 수하물 하나하나 추가 비용을 받는다. 아무런 서비스를 받지 않으면 고속버스보다 싸게 이동할 수 있지만, 대형 항공사 같은 서비스를 하나하나 챙기다 보면 전체 운임은 껑충 뛴다.

대신 티켓 값은 저렴하다. 사우스웨스트항공이 매주 수요일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공항에서 네바다 라스베이거스공항까지 운항하는 항공편(460㎞)의 편도 가격은 69달러(약 9만4000원)다. 사우스웨스트항공 관계자는 “저렴한 요금으로 갈 수 있는 여행지를 고객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사우스웨스트항공을 설립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유럽의 대표 LCC인 라이언에어는 한술 더 뜬다. 다음달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오스트리아 빈 등 유명 관광지 10여 곳으로 향하는 항공편의 최저가를 16.99유로(약 2만5000원)로 책정했다. 회사 관계자는 “가격을 최대한 낮춘 덕분에 지난해 1억8690만 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다”며 저가 정책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에 LCC가 생긴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지금은 사라진 한성항공(2003년)이 1호였다. 2005년부터 제주항공이 등장하는 등 LCC가 잇따라 설립되면서 9사 체제가 됐다.

경쟁이 심화하자 한국에서 LCC는 미국 유럽 등과 다른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대면 체크인에도 돈을 받지 않고, 대부분 수하물도 1개까진 무료다. 유럽 미국 호주 등 중장거리 노선에는 무료 기내식도 준다. “한국 LCC는 새로운 형태의 대형 항공사(FSC)”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업계 관계자는 “10~20년 전 이마트가 ‘한국형 대형마트’를 표방하며 세계 최대 창고형 마트인 월마트와 카르푸를 몰아낸 것처럼 ‘한국형 LCC’도 시장에 안착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美·유럽 등 장거리 시장도 진출, 폭발적 성장 … 'LCC 전성시대'
한편 대한민국 하늘길이 활짝 열리자 외국 항공사들도 한국 시장 공략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국 하늘길 공략의 선봉에 선 외항사는 ‘오일 머니’가 풍부한 중동 항공사들이다. 올 들어 에미레이트항공(인천~두바이) 카타르항공(인천~카타르 도하) 에티하드항공(인천~아부다비) 등 중동 3대 항공사가 일제히 인천발 운항편을 확대했다. 에티하드항공은 한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여행객을 잡기 위해 중간에 들르는 아부다비의 호텔 숙박권을 주고 있다. 이 밖에 미국 델타항공은 올 들어 인천~애틀랜타 운항편을 확대했고, 에어뉴질랜드는 10월부터 인천~오클랜드 직항 노선을 재개하기로 했다. 독일 루프트한자는 지난 4월 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에 외항사 처음으로 체크인 카운터를 열었다.

업계 관계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합병해 FSC 운항편이 줄어들면 외항사의 점유율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정은 기자 newye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