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에 있는 효성첨단소재의 탄소섬유 공장에서 한 직원이 제품을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전북 전주에 있는 효성첨단소재의 탄소섬유 공장에서 한 직원이 제품을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원유만 팔던 중동 기업들이 잇달아 석유화학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그로기’ 상태로 내몰린 국내 석유화학업계에 새로운 강적이 추가된 것이다. 적자가 심화한 우리 기업의 고민은 더 깊어지고 있다. 범용 사업을 정리하고 고부가가치 소재(스페셜티) 사업 투자를 늘리는 게 유일한 대응 방안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동 석유社, 120兆 투자 러시

中·중동의 석유화학 공세…살 길은 '스페셜티'
업계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오만 등 중동 석유기업이 짓는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COTC)은 총 8개다. 투자 금액만 910억달러(약 123조원)에 달한다. 원유부터 석유화학 제품까지 일관생산 시스템 구축에 나선 ‘중동의 변심’에 국내 기업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중동의 석유화학 산업 진출은 선진국들이 탈탄소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석유의 미래’가 어두워지자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해서다. 원유를 뽑아낸 자리에서 곧바로 석유화학제품을 만들 수 있는 만큼 원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운송비를 아낀다는 점에서 최적의 투자였다. 원유 가공 과정을 확 줄인 COTC란 신개념 공장이 나온 것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다.

중동의 석유화학 시설은 올해부터 2027년까지 순차적으로 문을 연다. 현재 중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COTC 프로젝트는 총 8개다. 예상 에틸렌 생산량은 연 1123만t으로 LG화학 등 한국 주요 6개 기업의 생산량에 필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5년 안에 한국보다 큰 석유화학 강국이 생긴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쿠웨이트국영석유화학회사(KIPIC)는 지난달 알주르 공장 부분 가동에 나서며 신호탄을 쐈다. 아람코가 짓고 있는 세계 최대 COTC 공장인 얀부 석유화학 단지는 내년 가동에 들어간다.

중동에서 생산한 석유화학제품이 시장에 풀리면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요는 그대로인데 공급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이 엄청난 물량을 시장에 쏟아내고 있는 탓에 석유화학업계의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나프타 가격-에틸렌 가격)는 추락하고 있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국내 6대 석유화학업체의 영업손실 규모는 작년(5668억원)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솟아날 구멍은 ‘스페셜티’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은 스페셜티 경쟁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범용 제품에선 중동과 중국의 가격 경쟁력을 이길 수 없기에 스페셜티로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전략이다. 에틸린을 구매해 중간재를 만드는 다운스트림 기업들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효성첨단소재는 2008년 철보다 훨씬 가벼운데도 강도는 10배나 센 탄소섬유 개발에 착수했다. 항공기 외관 구조물, 수소탱크 등을 제조할 때 쓰여 중국과 기술 격차가 있는 제품이다. 효성첨단소재 관계자는 “탄소섬유는 제품의 질뿐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도 중요하기 때문에 중국 기업들이 쉽게 못 들어온다”고 말했다.

태양광 필름 등에 쓰이는 폴리올레핀엘라스토머(POE) 소재 분야의 강자인 DL케미칼도 그런 회사 중 하나다. 고무와 플라스틱 성질을 함께 지닌 POE는 기존 태양광 필름보다 충격에 강하고 전력 손실도 줄여준다. 아직 중국에 POE를 생산하는 기업은 없다. LG화학도 POE 등 신소재를 생산하고 있다.

롯데정밀화학은 전통 석유화학의 틀에서 벗어난 신제품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종이 원료로 쓰이는 셀룰로스를 가공해 의약용 캡슐, 식품용 첨가제 등으로 수요처를 넓혔다. 금호석유화학도 중국의 타깃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석유화학 기업으로 꼽힌다. 중국 기업들이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타이어용 합성고무 시장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해서다.

업계 관계자는 “대다수 스페셜티 분야에서 한국이 중국에 앞서고 있지만, 그 격차는 그리 크지 않다”며 “중국에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사업 재편을 통해 스페셜티 분야에 더욱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