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섯째 날엔 죽었답니다.

이 문장은 독일 어린이 동화 ‘수프 안 먹는 카스파 이야기’ (Die Geschichte vom Suppen-Kaspar)의 마지막 구절이다. 동화책의 내용은 이러하다.

건강하고, 동글동글 통통한 소년이었던 카스파는 식탁에서 단정히 수프도 잘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떼를 쓰기 시작하며 수프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카스파는 매일 점점 마르고 약해지다가 나흘째 되는 날 몸무게가 8g이 될까 말까 실오라기처럼 말라버린다. 결국 다섯째 날 죽는다.
하인리히 호프만 <슈트루벨페터>에 수록된 ‘수프 안 먹는 카스파 이야기’
하인리히 호프만 <슈트루벨페터>에 수록된 ‘수프 안 먹는 카스파 이야기’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는 다소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가? 동화책 하나를 더 소개하겠다.

‘엄지 빠는 아이 이야기’ (Die Geschichte vom Daumenlutscher). 어린 소년 콘라트에게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없는 동안 단정히 말 잘 듣고 있고, 특히 손가락을 빨아선 안 된다고 말이다. 손가락을 빨면 재단사가 가위를 들고 와서 손가락을 싹둑 자를 거라고 겁을 주고 나간다. 아랑곳하지 않았던 콘라트는 손가락을 입으로 쏙 넣는다. 그러자 ‘쾅’하고 문이 열리더니, 재단사가 나타나서 콘라트의 두 엄지손가락을 싹둑싹둑 잘라버린다.

이 잔인하고 충격적이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한 동화는 1844년 독일 정신과 의사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이 펴낸 어린이 동화 모음 <슈트루벨페터> (Struwwelpeter)에 수록되어 있다. 원제는 ‘데어 슈트루벨페터’ (Der Struwwelpeter)로, 한국에서는 <더벅머리 페터>로 출간되었다. <슈트루벨페터>는 그 강렬한 내용과 삽화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부 부모와 교육자들은 이 책이 아이들에게 너무 무섭고 충격적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아동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 지금까지 많은 독일인들이 알고 있는 동화이며 물론 아이들 또한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야기이다.
하인리히 호프만 <슈트루벨페터>에 수록된 ‘엄지 빠는 아이 이야기’
하인리히 호프만 <슈트루벨페터>에 수록된 ‘엄지 빠는 아이 이야기’
처음 이 동화책을 접했을 때는 나 또한 가히 충격적이었다. 말 안 듣는 한 아이 버릇을 고치고자 어른들이 생각해 낸 묘안이 인터넷 콘텐츠 서비스에서나 접할 수 있는 가학적 내용의 동화책이라니.

이 동화책을 본 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많은 참사들이 무심코 떠올랐다. 그리고 한 소아청소년과 교수의 인터뷰도 스쳐 지나갔다.

“처참한 사고 현장에 관한 이야기로 뉴스가 떠들썩 할 때 아이들도 듣고 느낍니다. 숨기려고 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정직하고 간결하게 설명해 주세요. 아이들이 슬픔, 두려움, 혼란을 느낄 때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간접 경험으로 아이들은 대처할 방법을 배우고, 공감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인터뷰를 보았을 때와 <슈트루벨페터>를 읽고 난 다음의 감정이 유사했다. 아이들에게는 항상 아름다운 그림과 행복한 이야기, 예쁘고 꽃향기가 나는 따스한 봄날 같은 이야기만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나로서는 의아했다. 극단적이고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사회의 현상들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부분이 말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생각의 큰 변화가 생겼다. 책을 편집하면서 수많은 그림책을 읽고 접하면서 느꼈던 것은 유사한 책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천편일률적인 크기와 모양, 글씨, 통일된 종이의 질감, 유아 시절에 필요한 습관이나 인성, 권선징악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찬 동화책 들이 아이들에게 암묵적인 규칙과 보이지 않는 틀을 씌우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사춘기 14살만 되면 부모를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하는 아이들에게 곧 펼쳐질 세상은 콘라트의 두 엄지를 자르러 나타난 재단사의 가위만큼 날카롭다. 세상은 팅커벨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며,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 줄 마법 양탄자가 신발장 앞에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섯째 날엔 죽었답니다… 동화책 한번 살벌하네
옛날 우리나라의 구전 동화 또한 호랑이가 엄마를 잡아먹고 엄마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다소 충격적인 전개이지만 할머니의 품 안에서 손자, 손녀들에게 온기 있게 전해져 내려왔기에 잔인하다고 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어른들은 죽음이나 두려움, 불안 등과 같은 감정들을 아이들에게 숨기거나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결국 아이들은 여러 온라인 매체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폭격기처럼 쏟아지는 콘텐츠에 현혹되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감정의 폭풍 속에서 매몰되고 있다.

아이들이 단지 밝고 행복한 이야기들만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측면을 경험할 수 있는 책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림책으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의 소재에서 슬픔, 외로움, 무서움, 두려움, 불안함 등을 터부시하고 행복, 사랑, 올바른 인성만을 강조한다면 아이들은 그러한 감정을 미리 간접적으로 경험할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그림책 속 이야기는 아이들이 감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분노, 두려움과 용기 등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공감 능력을 키우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섯째 날엔 죽었답니다… 동화책 한번 살벌하네
또한, 그림책은 그 물성 자체로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그림을 눈으로 따라가며, 종이의 냄새를 맡고,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은 모두 아이들에게 신선한 추억을 선물한다. 이는 아이들이 세상을 더 풍부하게 느끼고, 자기 감각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몇 년 전 5살 난 딸아이에게 옛날 그림책을 읽어준 적이 있었다. 서울로 돈을 벌러 가시는 엄마가 아이와 헤어지면서 진달래꽃이 피면 돌아오련다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난다. 아이는 매년 봄 진달래꽃이 피면 그 옆에 앉아 엄마를 기다린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막 5살 난 딸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가슴에 와락 안겨 한참을 크게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함께 울었다. 이제 종알종알 말을 하고 나 언니가 되었다며 으쓱대는 5살 아가가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저렇게 서럽게 우는지 참 신기하기도 했다.

더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눈이 벌게져라 울더니 다음날 또 읽어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도 울고 그다음 날도 울면서도 계속 읽어달라는 아이를 보며 마음속이 일렁였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을 그림책을 통해 아이가 생각하고 느끼며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 대견스러웠다.

<더벅머리 페터>와 같은 동화를 소위 말하는 ‘애 잡는 동화’로 닫아놓지 말고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조금은 이상할 수도 있는, 다양한 소재의 책들이 아이들에게 자주 많이 선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들의 그림책을 만드는 편집자로서 그 새로운 물결을 같이 타고 흘러가기를 희망해 본다.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