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89·가운데)가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파크하얏트호텔에 도착해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 환영 인사를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미국 방문은 2017년 이후 처음이다. 이번 방미의 공식적인 목적은 무릎 치료지만, 일각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회담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레즘과의 일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레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레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에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전선 650㎞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저항하면 학살 … 전문가는 몽골로 보내몽골군이 출현하자 방위병들은 400명의 투르크 병사만 성채 안에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일부 병사는 부하라시 요새를 점거한 채 12일간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에 결국 제압됐다. 이후 몽골군이 부하라에 대해 처한 행동은 이후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칭기즈칸 군대에겐 일종의 행동규범이 됐다. 특히 인력, 고상한 표현으로 인적 자원 처리에 있어서 그러했다. 우선 장인들(특히 무기 제조장인과 방적공)처럼 쓸모 있는 사람들은 엄선돼 동쪽의 몽골지역으로 보내졌다. 젊은이들은 몽골군의 다음 전투에서 활용될 ‘화살받이(arrow fodder)’로 잡혀갔다. ‘화살 폭풍(arrow storm)’이라고 불리는 집단 사격으로 적군의 혼을 빼놨던 몽골군은 적군의 공격에 대한 ‘싸고도 유용한’ 그러면서 ‘살아 있는’ 방어수단도 확실하게 챙겼다. 실제로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금나라 병사들은 자신들의 친인척, 이웃을 방패로 앞세워 밀고 오는 몽골군에게 차마 대항을 못하다가 괴멸되기도 했다. 이어 부하라는 당시 몽골군의 약탈에 내맡겨졌고 불에 타서 도시 자체가 파괴돼버렸다. 도시의 약탈은 몽골군의 정식 수입 수단이기도 했다.몽골군은 정복한 국가의 인재를 활용하는 데서도 뛰어났다. 중국인과 무슬림 출신 공성전 전문가를 대동한 몽골군은 호레즘 샤의 예상과 달리 ‘성을 무너뜨리는 법’에도 능통했다. 부하라 주민들에 대한 처리는 일종의 본보기였다. 완강하게 저항해 몽골군에게 피해를 입힌 도시는 함락된 뒤 주민들이 학살되는 대가를 치렀다. (농사를 짓고 사는) 정주민을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는 존재”로 인식했던 몽골군으로선 정주민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에 대해 윤리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몽골군은 좋게 말하면 사고가 유연했다. 같은 유목제국이었던 여진족의 금나라만 하더라도 12세기 후반 몽골군의 참략에 시달리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조정이 오행의 순환이론에 따른 정통성 논쟁에 빠져 있을 정도로 ‘한화(漢化: 중국에 동화)’가 진행됐지만 몽골족은 달랐다. 무의미한 관념론 논쟁에 빠지면서 대응 기회를 놓쳤던 금과 달리 칭기즈칸 휘하 맹장인 제베와 수부타이가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에 도착했을 때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을 활용해 방패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놓고 싸울 정도였다. 결국 이 같은 몽골군과 직면한 호레즘은 속수무책이었다. 코끼리부대를 포함해 호레즘의 정예 엘리트 군단이 지키고 있던 사마르칸트 역시 부하라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사마르칸트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의미한 항전을 포기했고 며칠 만에 성문을 열었다. 몽골군은 자발적으로 항복한 5만 명의 시민을 학살하지는 않았지만 “말과 사람(발)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사마르칸트의 성벽을 허물어버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20만디나르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휘하에 있으면서 몽골에 항복한 시민들은 도시 밖으로 보내졌고, 도시에선 약탈이 자행됐다. 1221년에는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총 10만 명의 장인들이 몽골과 중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역참 설치로 동서 간 교류 확대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순간을 동서제국의 인적 교류가 활성화된 때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몽골제국은 복속국에 빼놓지 않고 역참 설치를 강요했다. 고려와 러시아, 베트남 등 간접적인 지배를 받은 나라도 모두 역참을 설치할 것을 요구받았고,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신속한 정보 전달과 교류가 가능했다. 당시 중국에서 차출된 공성전문가와 농부들이 아제르바이잔이나 메르브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의사와 천문 관측사, 통역사, 기술자, 심지어 요리사도 동서제국 간에 교환됐다. 이슬람권에서 발달한 의학과 천문학, 지리학 관련 지식은 이들을 통해 동방에 전수됐다.또 몽골인들의 중국 지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란 뜻의 ‘제색목인(諸色目人)’의 준말인 ‘색목인’이라고 불린 티베트, 위구르, 킵차크, 캉글리, 알란인과 이란 아랍 계통의 무슬림이 동원됐다. 킵차크와 알란, 캉글리 출신들은 주로 군사 분야에 동원됐고 위구르인은 재정과 행정 분야에, 티베트인은 불교 분야에 주로 배치됐다. 좀 더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서아시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훌레구에게 몽골의 대칸이었던 묑케가 몽골 최고의 레슬링 선수를 빌려줘 지역 장사와 대결하게 한 사례도 있다. 원나라 시대에는 하늘의 뜻을 읽기 위한 두 번째 의견(더블 체크)을 얻기 위해 페르시아 점성술사(천문관)가 중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고 한다.한편 도시를 점령한 뒤 약탈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성 밖으로 불러낼 필요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은 몽골 팽창 기간 내내 계속 이어졌다. 도시를 파괴하는 방식도 옥수스강의 둑을 무너뜨려 도시 전체를 완전히 박살낸 우르겐치처럼 다양화돼 갔다. 무력시위를 기반으로 한 몽골식 강제 인적 교류와 확장은 몽골제국이 틀을 잡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278~1290년대 초까지 원 제국은 직접적인 지배 지역으로 보기 힘들었던 미얀마와 베트남, 인도 바아바르와 코람, 샴, 자바, 류큐 등 동남아 여러 지역을 적극적으로 교역권으로 합류시켰다. 1279년 원 세조 쿠빌라이는 해외 여러 나라를 초유(招諭·불러서 타이름)하라고 지시했고, 같은 달 국내외 여러 군주에게 이 같은 내용의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1282년 정월을 기해서는 선박 100척과 군사 및 사공 1만 명을 동원해 해외 여러 지역을 원정하게 했다. 그리고 이 같은 원정은 1280년대 내내 계속됐다. 육상 기마전뿐 아니라 대규모 선단을 동원해 교역의 물꼬를 튼 셈이다. 그리고 강제적인 인적 교류이긴 하지만 몽골 지배 아래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첫발을 내디디게 됐다. NIE 포인트① 세계화와 교류 확대가 성장과 발전을 한층 강화하는 이유는 왜일까.② 당나라 때도 로마와 교류하는 등 동서 교류가 있었지만 몽골 시대가 세계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③ 한때 동유럽과 러시아까지 지배했던 몽골이 지금처럼 쇠퇴한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지칠 대로 지친, 수 백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3일 동안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의 탄구령(坦駒嶺) 정상에 도달했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현재의 키르키트인 소발률국(小勃律國)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당나라를 압박한 토번과 사라센 제국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당태종은 토번의 임금인 송챈감포(松贊岡保)에게 딸인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낼 정도였다. 울면서 멀고도 먼 티베트까지 시집을 간 그녀의 애달픈 사연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토번은 이 무렵에는 더욱 막강해져 당나라의 장안을 위협하고, 서북쪽으로 진출해 파미르 고원의 산악 지대와 수십 개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면 당나라는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동로마까지 이어지는 물류망이 위험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는 상황이었다.한편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다. 3번이나 군대를 파견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은 고선지 장군을 선택해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윤명철,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고선지는 누구일까. 668년 9월, 고구려는 항복을 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보장왕과 귀족들, 장군과 기술자 등 3만여 명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현재 시안)으로 끌고 갔다. 또한 669년 4월에는 20만명에 달하는 고구려 사람들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구실로 장쑤성·산둥성 등의 해안 지대와 내륙의 쓰촨성, 심지어는 사막지대인 간쑤성까지 끌고 가 황무지를 개척하게 만들고, 변방을 지키는 군인으로 삼았다.그때 고구려 출신의 뛰어난 장수가 고사계였다.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실력을 쌓았는데, 고구려인의 후예답게 말 타기와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 지금 신장성 지역에서 전공을 세운 그는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유격 장군’이라는 직위에 올랐다. 이어 747년에는 안서부도호라는 직책으로 승진하고, 본영을 쿠차(龜慈)에서 더 서쪽인 투루판(吐魯蕃)으로 옮겼다. 그 곳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도시이고, 당나라의 태종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와중에 멸망시킨 고창국(高昌國)의 수도였다. 고구려 출신 병사들과 서역 정벌현종의 명을 받은 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소설 서유기에서 묘사되듯 몽골의 고비사막과는 달리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사막이다. 무려 35일을 횡단한 끝에 서쪽 끝의 카쉬카르(현 신장성 카스)에 도착했다. 카쉬카르는 지금도 위구르인들의 독립 저항이 간간이 발생할 만큼 중국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서 아시아의 동과 서, 남과 북의 길이 만나는 십자로 같은 곳이다. 고선지 장군은 다시 남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해서 파미르 고원에 다다랐다.‘총령(蔥嶺)’으로 불리는 파미르 고원은 평균 높이가 5000m가 넘는다. 접근하고, 우회하는 길도 협곡과 급한 물살로 이뤄졌고, 정상에서는 고산병이 심각하고, 큰 생명체들은 살 수 없는 거친 환경이다. 지금도 행군하기 힘든 지역을 건너 무려 100일 동안을 행군한 끝에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했다. 연운보 전투를 벌여 적군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000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했다. √ 기억해주세요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당나라는 고선지 장군을 선택해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고구려 유민 2세인 고선지는 고구려인의 후예답게 말 타기와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 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해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파미르 고원을 행군한 고선지 부대는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해 승리를 거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2년 취임 이후 처음으로 티베트 시찰에 나섰다. 이 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 탄압을 비난하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압박에 맞서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시 주석이 지난 22일 티베트 한 지역에서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신화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