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제단체 8곳이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에 공동으로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다. 정부와 국회에 “기업 경영 활동을 위축시킨다”며 “무리한 상법 개정을 말아달라”고 건의했다. 국회 통과 일정도 불투명한 배임죄 폐지를 앞세워 흘려넘길 말이 아니다.

대주주와 소액주주, 장기투자자와 단기투자자는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사회가 모든 주주의 이익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사의 충실 의무가 주주로 확대되면 경영진의 모든 의사결정에 법적 논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영 판단에 대해서든 ‘주주 이익 침해’를 이유로 소송이 남발될 수 있는 것이다. 경영 활동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회사 명운을 가를 대형 투자나 인수합병(M&A)은 훨씬 어려워질 것이다.

한국엔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 수단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상법이 개정되면 ‘주주 이익’을 명분으로 기업 경영권을 위협하는 ‘기업 사냥꾼’이 활개 칠 공간 역시 넓어진다.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가 글로벌 스탠더드도 아니다. 미국 모범회사법을 비롯해 영국 독일 일본 캐나다 등 대부분 선진국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로 명시하고 있다. 정부가 상법 개정의 근거로 삼는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에 ‘회사 및 주주’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는 ‘회사 이익이 주주에게도 이익’이란 일반론적 문구라는 게 학계 중론이다.

주주와 이사 간에는 법적 위임 관계도 없다. 상법상 이사는 회사의 대리인으로 주주와 계약을 체결하는 게 아니라 주주총회 결의로 회사가 임용한다. 상법을 바꿔 이사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건 국내 법체계에 어긋나는 것이다.

정부의 소액주주 보호 취지는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대주주 사익편취 금지, 쪼개기 상장 때 반대 주주에게 주식매수청구권 부여 등 대주주 전횡을 막는 장치가 이미 도입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