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니, 쿠닝의 사랑방이 된 판화 공방…시드니 펠센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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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 GEL 공동 창립자
시드니 펠센 99세로 별세
시드니 펠센 99세로 별세
빌렘 드 쿠닝, 데이비드 호크니, 세실리 브라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뒤에는 늘 그가 있었다. 때로는 작가들을 든든하게 지원하는 대부(代父)로, 때로는 ‘아지트’를 내어주는 격의 없는 친구로. 최근 타계한 미국의 전설적인 갤러리스트 시드니 펠센(1924~2024)의 이야기다.
60년 전통의 판화 공방 ‘제미나이 GEL’을 공동 창립한 펠센이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제미나이 GEL(Graphic Editions Limited)은 1966년 설립 이후 미국 서부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갤러리다. 시작은 LA 멜로즈 애비뉴의 허름한 공방이었다. 1975~1979년 캐나다의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의 손을 거쳐 지금의 새하얀 갤러리 건물로 재탄생했다. 펠센이 처음부터 예술과 가까운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그의 부모는 미국 시카고에서 청과점을 운영했다. 10대 때 온 가족이 LA로 이주한 이유도 싱싱한 농산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군에 입대해 유럽에 주둔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들어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선 회계학을 전공했다.
타고난 멋쟁이 기질은 숨길 수 없었다. 챙이 넓은 페도라와 뿔테 안경을 즐겨 쓰던 영락없는 LA 신사의 모습이었다. 낮에는 회계사로 근무하고 밤에는 취미로 그림과 도자기 수업을 듣는 생활이 이어졌다.
전업 갤러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40대 초반부터다. 판화 장인 케네스 타일러의 작업실을 우연히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원화의 ‘복제품’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던 판화의 독창적인 기법에 매료됐다. 펠센은 대학 동창 스탠리 그린스타인을 불러 타일러의 공방을 갤러리로 꾸며나가기 시작했다. 제미나이 GEL이 탄생한 순간이다.
갤러리 설립 초기까지만 해도 펠센은 판화의 성공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는 2016년 한 인터뷰에서 “돌이켜보면 순진하고 무모했다”며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컬렉션을 쌓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란 막연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혁신에 대해 열린 태도였다. 그래픽아티스트 로버트 라우센버그,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실험적인 예술가들이 갤러리로 모여들었다. 이뿐 아니다. 작가와 인쇄 장인이 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며 원작자의 예술혼이 깃든 ‘한정판 판화’ 제작 방식을 정립했다.
밤새도록 전시 오프닝 행사를 비롯한 사교모임을 연 것도 이전까지 보기 드문 일이었다. 펠센이 구축한 예술가 커뮤니티는 느슨하게 퍼져있던 1960~1970년대 LA 미술계를 결집하는 데 한몫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로도 활동한 펠센은 아티스트들의 흔적을 따라다녔다. 1970년대 ‘프렌즈’ 전시 준비를 앞두고 분주한 호크니의 옆모습, 잉크가 잔뜩 묻은 라우센버그의 손잔등 등 미술사적 기록들이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2003년 펠센은 이러한 사진들을 모아 <아티스트 관찰기(The Artist Observed>를 펴냈다.
펠센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 매일 갤러리에 출근해 사업에 관여했다. 100번째 생일을 목전에 둔 나이에 쓰러졌다. 만성 신부전이었다. 미국 LA 게티연구소(GRI)는 지난 2월부터 ‘가장 먼저 우정이 있었다: 시드니 펠센과 제미나이 GEL 아티스트’ 특별전을 열고 있다. 라우센버그(1924~2008)부터 줄리 메레투(1970~)에 이르는 반세기 넘는 펠센과 아티스트의 우정을 조명하는 전시다. 전시는 7월 4일까지.
전시장을 찾은 줄리 메레투는 “내가 제미나이 GEL에서 배운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판화를 통해 무엇이 가능한가’였다”며 “그보다 더 깊은 건 펠센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 즉 사랑하는 방법, 인생을 즐기는 방법, 열심히 일하는 방법, 그리고 그 모든 삶을 우아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라고 말했다.
안시욱 기자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뒤에는 늘 그가 있었다. 때로는 작가들을 든든하게 지원하는 대부(代父)로, 때로는 ‘아지트’를 내어주는 격의 없는 친구로. 최근 타계한 미국의 전설적인 갤러리스트 시드니 펠센(1924~2024)의 이야기다.
60년 전통의 판화 공방 ‘제미나이 GEL’을 공동 창립한 펠센이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제미나이 GEL(Graphic Editions Limited)은 1966년 설립 이후 미국 서부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갤러리다. 시작은 LA 멜로즈 애비뉴의 허름한 공방이었다. 1975~1979년 캐나다의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의 손을 거쳐 지금의 새하얀 갤러리 건물로 재탄생했다. 펠센이 처음부터 예술과 가까운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그의 부모는 미국 시카고에서 청과점을 운영했다. 10대 때 온 가족이 LA로 이주한 이유도 싱싱한 농산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군에 입대해 유럽에 주둔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들어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선 회계학을 전공했다.
타고난 멋쟁이 기질은 숨길 수 없었다. 챙이 넓은 페도라와 뿔테 안경을 즐겨 쓰던 영락없는 LA 신사의 모습이었다. 낮에는 회계사로 근무하고 밤에는 취미로 그림과 도자기 수업을 듣는 생활이 이어졌다.
전업 갤러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40대 초반부터다. 판화 장인 케네스 타일러의 작업실을 우연히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원화의 ‘복제품’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던 판화의 독창적인 기법에 매료됐다. 펠센은 대학 동창 스탠리 그린스타인을 불러 타일러의 공방을 갤러리로 꾸며나가기 시작했다. 제미나이 GEL이 탄생한 순간이다.
갤러리 설립 초기까지만 해도 펠센은 판화의 성공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는 2016년 한 인터뷰에서 “돌이켜보면 순진하고 무모했다”며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컬렉션을 쌓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란 막연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혁신에 대해 열린 태도였다. 그래픽아티스트 로버트 라우센버그,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실험적인 예술가들이 갤러리로 모여들었다. 이뿐 아니다. 작가와 인쇄 장인이 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며 원작자의 예술혼이 깃든 ‘한정판 판화’ 제작 방식을 정립했다.
밤새도록 전시 오프닝 행사를 비롯한 사교모임을 연 것도 이전까지 보기 드문 일이었다. 펠센이 구축한 예술가 커뮤니티는 느슨하게 퍼져있던 1960~1970년대 LA 미술계를 결집하는 데 한몫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로도 활동한 펠센은 아티스트들의 흔적을 따라다녔다. 1970년대 ‘프렌즈’ 전시 준비를 앞두고 분주한 호크니의 옆모습, 잉크가 잔뜩 묻은 라우센버그의 손잔등 등 미술사적 기록들이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2003년 펠센은 이러한 사진들을 모아 <아티스트 관찰기(The Artist Observed>를 펴냈다.
펠센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 매일 갤러리에 출근해 사업에 관여했다. 100번째 생일을 목전에 둔 나이에 쓰러졌다. 만성 신부전이었다. 미국 LA 게티연구소(GRI)는 지난 2월부터 ‘가장 먼저 우정이 있었다: 시드니 펠센과 제미나이 GEL 아티스트’ 특별전을 열고 있다. 라우센버그(1924~2008)부터 줄리 메레투(1970~)에 이르는 반세기 넘는 펠센과 아티스트의 우정을 조명하는 전시다. 전시는 7월 4일까지.
전시장을 찾은 줄리 메레투는 “내가 제미나이 GEL에서 배운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판화를 통해 무엇이 가능한가’였다”며 “그보다 더 깊은 건 펠센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 즉 사랑하는 방법, 인생을 즐기는 방법, 열심히 일하는 방법, 그리고 그 모든 삶을 우아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라고 말했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