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논쟁 소재로 민주주의 본질 다뤄…객석·무대 통합한 무대연출 돋보여

'믿음의 딜레마' 꼬집는 부조리극…연극 '크리스천스' 오늘 개막
"당신이 말하는 그 '완벽한 너그러움'을 위해선 결국 너그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너그러우면 안 된다는 건가요.

"
아내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담임 목사 폴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믿음'에 균열이 생긴 순간 이상과 현실의 부조리를 느낀 '뫼르소'처럼 입을 꾹 닫고 말았다.

25일 개막 공연을 앞둔 연극 '크리스천스'는 종교를 소재로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믿음'에 대한 논쟁을 그린 작품이다.

교회의 담임 목사 폴이 '지옥이 없다'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설교하고, 이에 반발한 부목사 조슈아와 일부 신도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연 초반 조슈아의 맹목적인 '믿음'보다 폴의 '믿음'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더 완벽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믿음'은 교회 장로 제이와 평신도 제니, 심지어 폴의 부인 엘리자베스와의 논쟁으로 판판이 깨진다.

폴의 '믿음'을 응원하던 관객들은 그 과정에서 당혹하거나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믿음'에 천착하는 것이야말로 곧 '믿음'을 배신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믿음의 딜레마' 꼬집는 부조리극…연극 '크리스천스' 오늘 개막
'크리스천스'는 종교적 논쟁을 외피로 입은 작품이지만, 그 속내는 취약한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과정을 꼬집는다.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보장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는 특정한 생각과 관점만을 절대시하는 생각과 관점마저도 관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 양립할 수 없는 생각과 관점의 충돌과 딜레마는 결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으로 작용한다.

'크리스천스'는 다양한 '믿음'이 존재하는 종교에 빗대 이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끊임없이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믿음'의 경쟁을 펼치지만, 결국은 상대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믿음'이 가장 강한 신념이 돼 끝까지 살아남는다.

무기력감을 느낀 폴이 "100년 후, 200년 후에도 이 종교에 대한 믿음이 과연 남아있을까"라며 탄식한 이유도 종교 또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한계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믿음의 딜레마' 꼬집는 부조리극…연극 '크리스천스' 오늘 개막
2018년 초연에 이어 6년 만에 재상연되는 '크리스천스'는 무대와 객석이 구분되지 않는 공연이다.

관객이 교회에 모인 신도가 돼 담임 목사의 설교를 듣듯이 공연을 관람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연 때부터 연출을 맡은 민새롬은 이번 공연에선 무대와 객석을 하나의 예배당처럼 꾸몄다.

무대는 목사가 설교하거나 신도들과 논쟁하는 장소로, 객석은 신도들이 앉아서 기도하는 곳으로 변했다.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신도 역할을 하며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배우들도 객석에 앉아 설교를 듣거나 객석을 지나 퇴장하는 등 객석과 무대의 구분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믿음의 딜레마' 꼬집는 부조리극…연극 '크리스천스' 오늘 개막
이런 무대 연출 덕분에 관객은 2시간이 넘는 공연 내내 몰입감을 유지할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느끼게 해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혼돈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깨달음을 얻는 폴의 입장을 고스란히 느끼는 신기한 경험까지 하게 된다.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폴 역을 맡은 배우 박지일의 빼어난 연기도 이 공연의 또 다른 볼거리다.

박지일은 공연 내내 무대에서 한 번도 퇴장하지 않은 채 흔들리는 믿음 속에서 무기력하게 좌절하는 내면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연극 '크리스천스'는 25일부터 다음 달 13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된다.

'믿음의 딜레마' 꼬집는 부조리극…연극 '크리스천스' 오늘 개막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