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의 도쿄를 방문한다면 어렵지 않게 벨 에포크 시기의 미술을 만나볼 수 있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는 ‘트리오: 파리, 도쿄, 오사카의 모던 아트 컬렉션’이 개최 중이다. 국립서양미술관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제작된 서양의 회화와 조각을 볼 수 있다. 일본에 가면 서양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 이는 벨 에포크 시대부터 버블 경제 시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프랑스 미술을 열심히 수집해 온 덕이다. 오늘은 일본과 프랑스, 두 나라가 공유했던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트리오: 파리, 도쿄, 오사카의 모던 아트 컬렉션’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그리고 파리 시립미술관의 근대미술 컬렉션 150여 점을 선보인다. ‘도시와 사람들’, ‘광고와 모던 걸’, ‘도시의 산책자’ 등 공통의 키워드 34개를 선정해 전시를 구성했다. 예를 들어, ‘모델의 파워’라는 주제에서는 모딜리아니, 마티스, 그리고 일본 작가 요로즈 테츠고로의 작품을 비교해 소개한다. 20세기 초부터 오늘날의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세 미술관이 소장한 서양과 일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앙리 마티스 <의자와 오달리스크> (1928), 파리 시립미술관 소장.
앙리 마티스 <의자와 오달리스크> (1928), 파리 시립미술관 소장.
이 전시를 주최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은 1952년에 설립되었다. 일본에서 소장품 수집을 처음으로 시작한 미술관이자, 일본과 서양의 근현대미술에 관한 방대한 컬렉션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소장품 중에는 벨 에포크 시기 서양 거장들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오사카의 나카노시마 미술관은 2022년에 문을 연 신생 미술관이다. 개관 이후 소장품이 포함된 모딜리아니의 전시를 시작으로 ‘툴루즈 로트렉과 무하의 파리에서의 10년’, ‘클로드 모네: 연작 회화로의 여정’ 등 벨 에포크 시기 주요 작가들의 전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두 미술관의 사례를 보면, 일본의 미술관들은 설립 시기와 관계없이 잘 알려진 서양 근대미술품을 소장한 경우가 많고, 관련 전시 역시 자주 개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헝클어진 머리로 누워있는 누드> (1917),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헝클어진 머리로 누워있는 누드> (1917),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소장.
국립서양미술관은 중세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서양미술 작품만을 소장, 전시한다. 이 미술관은 사업가인 마쓰카타 고지로가 20세기 초 유럽에서 직접 수집한 서양의 회화, 조각, 가구를 기증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고지로는 1만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파리에 보관하고 있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프랑스 정부가 그의 소장품을 적국의 자산으로 분류해 압류하게 된다. 전쟁 종료 후 일본과 프랑스의 관계 개선을 위해 프랑스 정부가 이 컬렉션의 일부를 반환했고, 이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1959년 국립서양미술관이 설립되었다. 마쓰카타의 컬렉션 370점에서 시작된 국립서양미술관의 현재 소장품 수는 6,000여 점에 달한다.

20세기 초의 파리에는 마쓰카타와 같은 컬렉터뿐 아니라 일본인 작가들이 300여 명 가까이 유학하고 있었다. 일본 미술가들의 파리 유학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급감했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 다시 급증했다. 1927년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던 일본인 사업가 사츠마 지로하치가 파리 대학에 일본관(Maison de Japan)을 건립해 기부하고, 일본과 프랑스의 국제 교류와 유학생 후원을 주도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와 일본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된 셈이다.

20세기 초의 파리에 이처럼 일본인 예술가와 컬렉터들이 많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당대의 파리가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미술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벨 에포크 시기의 미술은 프랑스 출신의 예술가들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외국인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에콜 드 파리가 함께 만들어낸 산물이다.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개인 소장.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개인 소장.
19세기 말부터 일본풍을 뜻하는 자포니즘의 인기가 드높았던 것도 일본과 프랑스의 교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867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프랑스 예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이 처음 일본의 미술을 접하게 된다. 일본 미술이 지닌 이국적인 면모, 간결하고 단순한 외형, 그러면서도 장식적이고 화려한 요소는 일본 미술에 대한 폭발적 관심으로 이어졌고, 일본 미술을 모방하거나 수집하는 분위기도 확산되었다. 반 고흐가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를 거의 모사하듯 그린 작품들은 자포니즘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모네 역시 기모노를 입고 있는 부인의 초상을 그리는 등 자포니즘에 대한 열광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던 대표적인 작가였다.
클로드 모네 <일본 여인> (1876), 보스턴 미술관 소장.
클로드 모네 <일본 여인> (1876), 보스턴 미술관 소장.
자포니즘이 미술의 중심지 파리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서양의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버블 경제 시기 일본의 컬렉터들이 값비싼 인상주의 미술을 앞다투어 사들이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버블 경제 시기 일본인들이 서양 명화를 구입하는데 들인 돈이 원화로 9조 원에 달한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도 존재한다. 비공식적인 구매까지 더하면 금액이 세 배 이상이라는 설도 파다하다.

1990년에는 다이쇼와 제지 회장이었던 사이토 료헤이가 고흐의 대표작 ‘가셰 박사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사들이는데 2000억 원 가까운 돈을 지불했다. 사이토는 자신의 사후에 이 작품들을 같이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가 전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들끓자 유언을 철회하는 웃픈 해프닝도 발생했다. 벨 에포크 시기의 명화를 구입하는데 엄청난 돈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던 사이토 회장의 아름다운 시절은 그가 1993년 뇌물 공여 혐의로 구속되고 3년 뒤 사망하면서 끝을 맺었다. 일본의 버블 경제 시대가 막을 내린 것도 이즈음이다.

20세기 초 자포니즘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일본의 컬렉터들은 이 시기에 파리에 머물며 벨 에포크 시기의 미술품을 수집했다. 아름다운 이 시절의 추억을 반추하듯 버블 경제 시기 일본의 컬렉터들은 인상주의 미술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이때 구입된 미술품 중 일부는 일본 내 여러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미술관을 방문해 서양의 명화들을 접하게 된다면 프랑스와 일본이 공유했던 과거의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면서 작품을 감상해봐도 좋을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