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 인정에 "언론자유 위험한 선례" 지적도…부인 "美에 사면 촉구할 것"
유죄협상부터 새벽 2시 공항이송까지…어산지 석방 막전막후
14년간의 도피극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52)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석방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어산지의 변호인이었다가 2022년 그와 옥중 결혼한 부인 스텔라는 "우리는 24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진정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산지는 미국 육군 정보분석원인 첼시 매닝을 설득해 기밀로 취급되는 외교 전문과 국방 정보를 빼돌려 2010년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했다.

유출된 정보에는 미군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한 비위가 담겨 있었고, 어산지는 범죄인으로 미국에 압송되는 걸 피하려고 2012년 영국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해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9년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중범죄자나 안보사범 등이 수감되는 최고등급 교도소인 벨마쉬 교도소에 갇혀 있던 그는 스파이방지법 위반 혐의로 자신을 기소한 미국 정부와 영국 법원에서 송환 여부를 놓고 법정공방을 벌여왔다.

이런 상황이 변화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건 올해 3월 어산지측 변호인단이 미 법무부에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도) 협상을 제안하면서다.

변호인단은 어산지에게 신체·정신건강상 문제가 있다면서 미국 측이 제기한 18개 혐의 중 한 건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하고 석방되는 방안을 내놓았다.

유죄협상부터 새벽 2시 공항이송까지…어산지 석방 막전막후
처음 미 법무부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으나 영국 정부의 미국 인도 명령에 항고한 어산지가 지난달 영국 고등법원에서 승소하면서 '터닝포인트'에 이르게 됐다고 위키리크스의 크리스틴 흐라픈손 대변인은 말했다.

미 검찰은 호주 국적자인 어산지에게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고, 영국 고법은 어산지가 차별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항고를 허용했다.

그런 가운데 어산지의 모국인 호주 정부도 조 바이든 미 행정부를 상대로 타협을 요구하며 외교전을 벌여왔다.

2022년 5월 출범한 호주 노동당 정부는 어산지 석방을 최우선 외교 과제 중 하나로 삼았고,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는 바이든 대통령과 리시 수낵 영국 총리를 만나 3국이 오커스(AUKUS·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 동맹으로 묶여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득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AFP와 AP 통신 등은 전했다.

흐라픈손 대변인은 어산지의 항소를 허용한 영국 고법 판결 이후 소송 장기화와 호주와의 관계 악화 등을 우려한 듯 미 정부의 접근법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은 몇개월 전 어산지에 대한 기소를 중지해달라는 호주 정부의 요청에 '우리는 그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건 그것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실제 선택지였다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양측 사이에선 어산지의 미국 법원 출석 여부를 놓고 밀고 당기기가 이어졌으나, 미 본토를 꺼리는 어산지의 입장 등을 고려해 호주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미국령 사이판 지방법원에서 심리를 진행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됐다.

유죄협상부터 새벽 2시 공항이송까지…어산지 석방 막전막후
영국 교정당국은 24일 오전 2시께 벨마쉬 교도소 내 감방에 있던 어산지를 깨워 수갑을 채웠고, 어산지는 엄중한 경호 아래 호송차량에 실려 런던 스탠스테드 공항으로 이송됐다.

흐라픈손 대변인은 "그는 호송차량으로 옮겨져 작은 박스에 넣어져 3시간 동안 앉아 있었고, 외부에는 최다 40명의 경찰관이 배치됐다"고 말했다.

위키리크스는 어산지가 사이판으로 출발하는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면서 52만 달러(약 7억2천만원) 상당의 전세기 비용 충당을 위한 모금을 호소했다.

이날 어산지가 탄 전세기는 캐나다 봄바디어사의 비즈니스용 제트기 글로벌 6000으로 올해 2월 미 유명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일본 도쿄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까지 이동할 때 사용해 환경오염 논란을 불렀던 전용기와 동일한 기종이라고 영국 BBC는 전했다.

어산지는 26일 오전 사이판 법정에 출두해 국방 정보의 획득 및 유포를 모의한 혐의 한 건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뒤 영국에서 수감돼 있었던 기간과 동일한 5년 2개월 징역을 선고받은 뒤 풀려나 호주로 귀국했다.

다만, 이러한 결말에 대해 언론계와 인권단체에선 어산지가 결국은 간첩법 위반 혐의 중 일부를 시인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는 건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위험한 선례가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자유로운 언론의 역할은 권력을 지닌 자가 허락한 것 이상의 정보를 밝혀내는 것"이라면서 "이번 합의는 미국 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비밀로 간주하는 정보를 입수해 출판한 행위가 범죄로 다뤄진 첫 사례"라고 말했다.

어산지의 부인 스텔라는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유죄 인정에 대한 언론계의 우려가 매우 큰 만큼 석방 이후 미국 정부에 '사면'을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