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22년에 열었던 사진전 <카니발>은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곡 <카니발 Carnaval, Op. 9>를 소재로 삼았다. 이 작품은 모두 22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모음곡인데, 나는 여기서 ‘스핑크스’와 ‘파가니니’ 두 곡을 뺀 나머지 20개의 성격소품(특정한 성격이나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소품)을 사진으로 만들었다. 근본적으로 낭만주의자였던 슈만은 음악 외적인 데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쓴 경우가 많았고, 이 작품 역시 연인을 비롯한 지인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썼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 상당수는 가면무도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 내적인 감정이 다르다. 나는 여기서 착안해 사진전에서 겉으로는 유쾌하지만 내적으로는 침울한 여러 인물의 특징과 그에 따른 상황을 꾸며 보고 싶었다.

사진으로 이를 표현하려면 일단 기획 단계부터 명쾌하게 정리해야 했다. 작가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데 관객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일단 만들고 해설은 비평가에게 떠넘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파편들이 뒤엉켜 있는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논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면무도회라는 장치를 통해 슈만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의 흐름이 한눈에 정리되어야 했다.

노트에 20개의 곡 제목과 내용을 기입하다 보니 인물과 관련된 곡, 춤곡, 정경 묘사 세 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었다. 광대 세 커플(6명), 실존인물(3명), 슈만이 지어낸 가상인물(2명), 가상의 단체(1곡), 춤(3곡), 정경(5곡)으로 구분하고 나니 이미지가 명확해졌다. 인물 구상을 먼저 하고 의미에 적합한 이미지를 고민했다. 여기에 색동을 매치한 이유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유 이미지여서만은 아니었다. 같은 간격으로 색상을 반복적으로 배열하는 것은 좋은 일이 반복되고 지속되길 바라는 기원을 가시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상징성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20개의 사진 모두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나비 Papillons’만큼은 한 번 더 이야기하고 싶다.
<나비 Papillons> / 사진. ©구본숙
<나비 Papillons> / 사진. ©구본숙
‘나비’는 <카니발> 전곡 가운데 아홉 번째 곡이다. 이 곡은 슈만이 음악가로서 첫 출발을 하게 된 가장 순수한 시기,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피아노와 헤어지고 작곡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빛나는 시기의 가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비는 신화, 문학, 예술에서 다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 나비란 표제는 슈만이 숭배했던 장 파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장 파울은 자신의 작품에서 나비를 자유롭고 이상적인 세계로 표현하였고, 이러한 생각을 반영하면 나비는 한층 높은 단계의 실현 및 영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나비가 변태하는 과정을 통하여 성장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탈바꿈하여 더욱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의 영향을 받은 슈만은, 나비의 연약한 날갯짓은 아름다움의 마지막 단계에서 예술적인 자아실현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슈만의 음악에서 나타난 나비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대상이었다. 이 곡에서 피아니스트는 아주 빠른 음으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이는 무도회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사진의 감상과 관련해 두 가지 주목할 만한 개념을 제시했다.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 그것이다. 전자는 사진을 볼 때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느낌을 갖는 것을 뜻한다. 작가의 의도가 관객에게 곧장 전달되는 경우이다. 시대나 지역 같은 포괄적인 정보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후자는 바르트의 말을 빌자면 “사진으로부터 화살처럼 날아와 나를 관통하는 것”,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또한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움켜쥐는) 것”이다.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똑같은 바닷가 풍경 사진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해수욕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경험을 떠올릴 수 있는 반면, 누군가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체험 때문에 공포에 질릴 수도 있다. 이런 게 푼크툼이다. 이런 것은 말 없는 사진에 속하는 차원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 의미가 면제된 차원을 말한다. 푼크툼이라는 개념은 스투디움에 비해 해석의 여지가 많은 개념이고,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으므로 대강 이런 뜻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으면 한다. 어쨌든 이 두 개념에 비추어 말하자면, 앞서 적은 ‘나비’에 대한 설명은 보편적으로 확립된 것으로 스투디움에 가까울 것이다. 이제 이야기하려는 것은 나의 해석, 나의 푼크툼이다.

나는 이 곡을 그리스-로마 신화와 연관 지어 파악했다. 신화에서 인간을 처음 만든 건 프로메테우스이다. 신들의 의사에 거슬러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고, 그 대가로 절벽에 사슬로 묶인 채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그가 최초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라는 이야기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직접 흙을 빚은 다음 햇볕에 정성껏 말려 신과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 이때 그의 작업을 유심히 지켜보던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나비 한 마리를 날려 보내주는데 그 나비가 인간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리스어 신화에서 영혼의 여신 프시케(psyche)는 나비로 묘사되기도 하고 그것은 정신, 마음,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나비가 코로 들어간 순간 육체와 영혼이 합쳐진다.
피아니스트 박상욱, 어린아이 같은 얼굴과 부드러운 선이 좋았다
왜 하필 나비를 보낸 여신이 아테나였을까?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여신이다. 심지어 처음부터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완전한 성인 여성의 모습이었으니 아테나에겐 성장 과정이랄 게 없다. 하지만 나비는 변태 과정(알-애벌레-번데기-성충)을 거쳐 완성된다. 어찌 보면 그녀는 자신에게 없던 ‘결핍’을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래서 슈만이 말하는 ‘나비’를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 곡의 주제를 관통하는 게 사랑이므로 결핍을 주는 일조차 사랑이라고.

박상욱 피아니스트에게 전화해서 촬영 컨셉트를 대강 설명하고 국내 일정을 물어본 다음 촬영 날짜를 정했다. 직접 얼굴을 맞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박상욱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요즘 살이 많이 쪄서요”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과 부드러운 선이 좋았다. 살짝 아이 같은 모습, 태초의 모습, 어른 같지 않은 느낌의 모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입체적인 나비가 덧대어 있는 팔랑이는 파란색 배경 천을 걸고 색동 베개에 눈을 지그시 감고 행복한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어달라고 했다. 짧은 머리카락은 파란 천을 유생들의 복건(도령모) 모양으로 둘러서 감췄다. 복주머니를 베게 위에 살포시 얹어 촬영하니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 피아니스트 박상욱이 애벌레에서 부화되어 다시 탄생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박상욱은 피아니스트 신미정과 함께 피아노 이중주단 ‘신박듀오’를 결성해 맹활약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이다. 신박듀오는 호흡과 밸런스가 좋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팀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것 같다고 호평한 바 있듯이 앞으로도 활동을 기대할 만한 사람들이다.

나비는 수많은 문화와 신화에서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 내면의 자아, 존재,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비가 번데기를 거쳐 성체로 우화하는 과정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나비의 색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사진의 배경으로 삼은 파란색은 모르포나비(Morpho butterfly)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이 나비는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에 서식한다고 하는데, ‘Morpho’는 그리스어로 ‘모습’이라는 뜻이지만 ‘변화’라는 의미도 있다. 이 단어 자체가 나비의 날개 색이 각도에 따라 현란하게 바뀌는 현상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다채로운 색을 지닌 피아니스트 박상욱 역시 나비가 되어 더 넓은 세상을 누비길 바란다.
피아니스트 박상욱, 어린아이 같은 얼굴과 부드러운 선이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모음집 <일인칭 단수>에서 음악적 소울메이트가 되는 남자와 여성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동서고금의 피아노곡 중에 딱 한 곡만 무인도로 가져갈 수 있다면 뭘 가져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주인공은 슈만의 <카니발>이라고 잘라 말한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 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이 구절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가면은 무엇일까. 또 나의 민낯은?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최선을 다해서 만남을 즐겁게 지내자는 사고방식이지만, 가끔 불편한 사람을 마주할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안 보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게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도 든다. 그것 말고도 모르는 것은 많다. 인생은 아직도 내게 수수께끼투성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문장 부호 ~(물결표)를 보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돈 적이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 옆에 으레 붙는, 탄생 연도 네 자리 숫자와 사망 연도 사이에 들어가는 물결표. 나는 탄생 연도는 있지만 물결표 오른쪽은 아직 공란이다. 그 공란이 숫자로 채워지는 그날까지, 적어도 가면은 쓰지 않고 솔직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냥 죽는 날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을 근래 들어 실천하고 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놀라지들 마시길…. 당신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구본숙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