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세 김현경 여사 구술 토대로 쓰인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 출간
"몸 아닌 정신으로 밀고 나가며 산다…김수영전집 요즘도 매일 읽어"
"김수영 시인은 나를 아방가르드한 여자라고 좋아했어요"
한국 현대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로 남아있는 시인 김수영(1921~1968).
그는 1968년 6월 15일 술자리를 마치고 을지로에서 버스를 타 밤 11시 20분쯤 마포의 집 근처 버스 종점에 내려 길을 건너다 버스에 치였다.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진 김수영은 이튿날 47세라는 이른 나이에 부인 김현경과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그 후 김수영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시인'이라는 세간의 평가 속에 어느덧 한국 문학의 전설이 됐다.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97) 여사는 얼마 전 남편의 56번째 기일(6월 16일)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온종일 홀로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26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그는 그날의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하는 듯 떨리는 음성으로 "60년대는 버스가 다니는 길 가운데만 아스팔트고 나머지는 흙바닥이었는데 김 시인이 차에서 내려 길가를 걸어오다가 그만 버스에 치이고 말았다"면서 "날이 갈수록 그날이 자꾸만 더 생각난다"고 했다.

기자가 김 여사와 통화한 건 최근 김수영기념사업회 홍기원 이사장이 쓴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어나더북스) 출간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김 여사의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부터 김수영과의 만남과 이별, 재결합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화를 김 여사의 구술을 바탕으로 홍 이사장이 쓴 일종의 인물 논픽션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4·19 혁명 등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한국 현대시의 거인으로 자리매김한 김수영과 그의 영원한 뮤즈이자 사랑의 대상이었던 김현경. 두 남녀의 내밀한 이야기가 당대의 문화사와 함께 흥미롭게 펼쳐진다.

"김수영 시인은 나를 아방가르드한 여자라고 좋아했어요"
김 여사는 척추 질환으로 지난 1년간 여러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병고를 겪었다.

최근에는 자택에서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다가 넘어져 늑골 세 개를 다쳤다.

너무 고령이라 수술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고령과 건강 문제로 이달 초 애지중지하는 둘째 손녀의 미국 대학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무척 아쉽다고 그는 말했다.

김수영·김현경의 두 손녀(차남의 딸) 중 첫째는 현재 미국에서 약학박사를 취득한 뒤 현지 대형 제약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는 미국의 명문 미술대학을 최근 졸업했다고 한다.

김 여사는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매일 책을 읽고, 가끔 자택을 찾아오는 문학계 인사들에게 손수 식사와 차까지 대접할 만큼 또렷한 정신으로 남편을 추억하며 기운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무엇을 읽고 있냐는 질문에는 "김수영 전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이의 시도 물론 들여다보지만, 김수영전집(민음사) 제2권의 산문 부분을 요즘 머리맡에 두고 계속 읽고 있어요.

지금도 느끼지만, 김수영은 참 능변이에요.

생전에 노력도 많이 한 사람이었지만, 글에는 타고난 힘이 있지요.

새삼 그이의 글을 읽으며 깨닫는 점이 많습니다.

"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는 1942년 5월 처음 서로를 알게 된 후 우여곡절 끝에 '그저 시를 잘 쓰는 아저씨'로만 느끼던 관계에서 김수영의 "문학하자"는 한마디 권유에 마침내 연인이 된 얘기, 이별 후 김 여사가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며 어학원에 다니던 중 재회한 김수영이 팔을 붙잡고 바이런의 시 '마이 소울 이즈 다크'(My soul is dark)를 읊으며 고백한 이야기 등 두 사람이 간직한 사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수영은 내게 '마이 소울 이즈 다크'라고는 했어도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고는 한 번도 안 했어요.

" (웃음)
"김수영 시인은 나를 아방가르드한 여자라고 좋아했어요"
저자가 책 제목에 '아방가르드 여인'이라고 쓴 것은 당대 일반의 통념이나 가치관, 윤리 의식을 뛰어넘었던 김 여사의 아방가르드한(전위적인) 자유로운 정신 때문이다.

책에는 김수영이 김현경을 "아방가르드한 여자"라고 부른 이유가 자세히 쓰여 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여의도에서 산책하던 둘은 한적한 곳에서 맑은 물웅덩이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무더위에 지쳐있던 김현경은 갑자기 입고 있던 원피스는 물론, 속옷까지 모두 훌렁 벗어버린 채 알몸으로 물속으로 뛰어든다.

김수영은 깜짝 놀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 그녀를 따라 알몸이 되어 물속에 뛰어든다.

그리고 두 연인은 인기척이 들려오기 전까지 한낮의 평화롭고도 관능적인 데이트를 즐긴다.

김수영은 훗날 이 일이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김현경에게 두고두고 "당신은 아방가르드한 여자야. 어디서 그런 실험 정신이 나왔어?"라고 묻곤 했다.

김 여사는 '아방가르드 여인'이라는 칭호에 대해 "책 내용은 70년 전 살던 얘기니까 좀 진부한 것도 있겠지만, 제목은 맘에 든다.

수영도 생전에 나를 흉보는 듯 말하며 '아방가르드하다'고 했다"면서 그게 김수영식의 애정 표현이었다고 회고했다.

현재의 젊은 독자들이 김수영을 여전히 읽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자 김 여사는 새로움과 솔직함을 꼽았다.

"김수영은 지금 읽어도 늘 새롭다는 거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읽어도 고리타분하다거나 '감성이 뭐 이따위야'라는 생각 절대 못 할 거예요.

또 무엇보다 솔직하고 진실하죠. 늘 이상을 생각하면서도 (현실의) 생활을 인식하고 살았던 시인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읽어도 느낌이 새롭네요.

"
여사는 100세를 앞둔 고령이지만 지금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고 말했다.

"요즘엔 정말,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정신을 차리고 100세까지 밀고 가야겠다고 생각해요.

"
여기서 '몸으로 밀고 나간다'는 표현은 김수영 시론(詩論)의 정수가 담긴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1968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김수영은 이 글에서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썼다.

김 여사와 2년에 걸쳐 꾸준히 만나며 구술을 채록해 책을 낸 홍기원 이사장은 김수영은 "영원히 젊은 시인"으로, 끊임없이 읽히고 재해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김수영이 "고독한 자유주의자"였다면서 "문인들 가운데 가장 혹독하게 전쟁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 끝없이 전진한 영원히 젊은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홍 이사장은 앞으로 서울 도봉구 김수영문학관 인근에 있는 시인의 본가 터를 '김수영 공원'으로 만드는 일을 꼭 해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시인은 어머니의 새카만 손 같은 문학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항상 노동하던 것처럼 그 성실성을 끝까지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그 어머니와 함께 살던 본가 건물은 현재는 알루미늄 섀시 공장이 됐는데, 이곳을 김수영 공원으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
"김수영 시인은 나를 아방가르드한 여자라고 좋아했어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