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 작가의 한자 이름은 金乙, 새 을자를 쓴다. 일제강점기에 동경에 유학을 다녀왔지만 고향에 돌아와 한학자로 평생을 살았던 그의 아버지는, 열한 번째 막내에게 ‘을(乙)’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며 살아라.”라는 것이 부친의 뜻이었고, 그것은 아마도 평생 김을 작가에게 화두가 되었을 법하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회화로, 드로잉으로, 오브제로 담아내지만, 때로는 새의 모습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머리는 김을 자신의 모양으로, 몸은 새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새는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 있다. 똑 떨어지기 직전의 눈물은 김을 작가의 중요한 도상 가운데 하나다.
김을 <우는 새(A weeping bird)>, 에프알피, 우레탄 도장, 298(h)x77x245cm, 2022
김을 <우는 새(A weeping bird)>, 에프알피, 우레탄 도장, 298(h)x77x245cm, 2022
경기 용인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는 그의 작품들, 그리고 곧 작품이 될 것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종일을 둘러보아도 다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작업은 때로 건축적인 규모로 제작되기도 하지만, 사실 작품의 핵심은 작은 드로잉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로잉은 대개 작업의 밑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김을의 드로잉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가끔 국영문 한문 글자가 동반되기도 하고, 간단하게 붓질이 지나가고, 곁에 있는 오브제를 이용하기도 하며, 포스트잇이나 견출지가 붙어 있기도 한(그것까지가 작품인) 김을의 드로잉은 예술의 정체에 대한 사유와 번번이 실패하는 고통의 산물이다. 급기야 그는 작품에 “그림 이 새끼!” 하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경을 토로하고 “그림이 필요 없는 즐거운 세상”을 꿈꾸기도 한다.
김을 <그림 이 새끼>, 걸레에 바느질, 15x25x4cm, 2011
김을 <그림 이 새끼>, 걸레에 바느질, 15x25x4cm, 2011
김을 <그림이 필요 없는 즐거운 세상>, 작업복에 바느질, 85x60x10cm, 2011
김을 <그림이 필요 없는 즐거운 세상>, 작업복에 바느질, 85x60x10cm, 2011
그는 “목숨을 걸고” 작업실에 간다고 했다. 예술가가 되기로 하고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요소들을 인생에서 배제한 후, 작품으로만 살아왔다. 정말 돈이 없었던 시절에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힘과 손재주가 좋은 그는 손쉽게 ‘잡부’에서 ‘십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 짓는 일을 총괄할 수 있는 ‘오야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일을 하면서 나는 알바가 아니라 정말 ‘노가다’이고 나머지 시간에 예술가가 되고자 꿈꾸는 사람이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집을 열일곱 채쯤 짓고 나니 비로소 예술에 집중할 수 있는 용인 작업실을 손수 지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온전히 작업에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 자신의 작업실 그 자체를 만들어 그 안에 관객이 들어가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 있는데, 이런 작업도 그의 집 짓는 실력이 작품 제작에 투여되어 빛나는 순간이다.
김을 <TZ studio>, 독일 쾰른 쿤스트라우메(Kunstraume, Köln, Germany) 전시 광경, 2018
김을 , 독일 쾰른 쿤스트라우메(Kunstraume, Köln, Germany) 전시 광경, 2018
위 <TZ 스튜디오>의 내부 모습
의 내부 모습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위 작품의 제목은 약어로 “TZ Studio”로 명명되었다. 낮과 밤의 경계 영역에 작업실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시간대는 흔히들 말하는 ‘개와 늑대가 구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며, 노을을 보며 뭔가 낭패감이 들거나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낮이건 밤이건 작업실에 머무는 그는 자신의 공간에 해 질 녘의 대기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남은 인생의 시간에 대한 은유일 것인가. 이 부분은 신비스럽게 간직하기 위해 작가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작업실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에 간다. 가장 많은 인생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 얼핏 과장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표현에 크게 공감한다. 집을 짓는 일은 완공의 시간이 있고, 회사에서 하는 일은 월급날이라는 것이 있다. 새해에 시무식을 하고 연말에 종무식을 하면서 올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기쁘게 맞는다.

하지만 작가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이튿날 다시 갈아엎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실망하는 일은 예사이고, 다시 작업에 돌입하기까지 자괴감을 이겨내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완성과 미완성이 불분명한 작품이라도 언젠가는 전시장의 환한 조명 앞으로 나와 삐딱한 시선의 관객들을 맞아야 하는 법, 도대체 그들이 작품을 어떻게 재단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작가의 운명이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운명을 인지하고 작업실에 가는 길은 심리적으로 험난하다. 김을은 그 과정을 산에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김을 < Untitled >, 혼합재료, 21x15x7cm, 2011
김을 < Untitled >, 혼합재료, 21x15x7cm, 2011
김을 <TZ Studio>, 종이에 수채, 35x23cm, 2019
김을 , 종이에 수채, 35x23cm, 2019
<Untitled>에서 작업실은 불쑥 올라선 바위 위에 위험하게 걸쳐져 있다. 작업실에 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돌고 돌아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아래에서 작업실을 올려다보면 한숨부터 나올 것 같다. 작업실 가는 길을 등산으로 비유한 여러 점의 입체 작품들이 있지만, 그나마 이 작품이 가장 간단한 길을 제시한다.

2019년의 <TZ Studio>에서는 시작부터 해골 표지판을 지나 구불구불 산을 올라, 암벽등반을 해야 할 것 같은 가장 높은 바위까지 가야 작업실에 당도할 수 있다. 그 와중에 폭포도 쏟아지고 짓다 만 건물도 보인다. 마치 검지를 뻗은 손처럼 보이는 기암절벽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작업을 하고 다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예술이 무엇이길래.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눈물이 묻어 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인간의 감정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눈물이다. 체액의 일부가 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총체로서의 눈물을 그는 가득 수집한다. 앞서 자신을 새 모양으로 만들어 눈물 한 방울을 흐르게 하였듯이 똑 떨어지는 모양의 눈물방울은 그의 작업실 여기저기에 가득하다. 벽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고, 하늘에서도, 작게 그려진 눈물 형상들이 서랍마다 담겨 있다.
김을 < Tear >, 혼합재료, 17x9cm, 2010
김을 < Tear >, 혼합재료, 17x9cm, 2010
눈물을 가득 실은 트럭 위에 앉아있는 사람은 김을 자신이다. 김을의 얼굴을 만들기는 매우 쉽다. 동그란 구형에 입가 팔자주름을 한 쌍씩 그리면 그것이 바로 그의 얼굴이다. 커다란 눈물 덩어리들이 가득 찬 트럭에 앉아서 멀리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작가의 형상은,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살아가는 누군들 눈물 한 트럭쯤이야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김을 <스튜디오>, 혼합재료, 17x18x12cm, 2024
김을 <스튜디오>, 혼합재료, 17x18x12cm, 2024
김을 <무제>, 종이에 수채, 29x21cm, 2010
김을 <무제>, 종이에 수채, 29x21cm, 2010
작업실에 관한 그의 작품은 계속된다. 흰 캔버스를 앞에 두고 붓을 들어 체조를 하기도 하고 망치로 부수어 버리는 제스쳐를 하기도 한다. 한 손에는 붓을 다른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있다. 붓과 망치는 사대부와 노비만큼이나 격차가 있어 보이는 사물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붓과 망치는 한 몸이다. 망치가 붓이고 붓이 망치이다. 이 두 사물의 균형 속에서 작품이 제작된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작품과 씨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꼭대기를 올라가야 시작될 수 있는 것, 굽이굽이 산등성을 돌아야 도착할 수 있는 것으로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였지만, 김을의 실제 작업실은 용인의 자택으로 일층을 작업실로, 이층을 주거 공간으로 쓰고 있다는 비밀 아닌 비밀을 폭로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물론 이 집은 김을이 망치를 들어 직접 지은 집이다.

이윤희 미술평론가·전시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