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빛으로 미술사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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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아트 선구자, 댄 플래빈
아트바젤 '빛에 대한 헌신展'
인공 조명이 뿜어낸 빛의 스펙트럼
백색 벽면에 사선으로 떨어뜨려
절제된 공간을 회화적으로 재창조
언젠가 꺼져버릴 유한한 재료로
영원불멸의 예술을 꿈꿨던 거장
아트바젤 '빛에 대한 헌신展'
인공 조명이 뿜어낸 빛의 스펙트럼
백색 벽면에 사선으로 떨어뜨려
절제된 공간을 회화적으로 재창조
언젠가 꺼져버릴 유한한 재료로
영원불멸의 예술을 꿈꿨던 거장


무한히 빛날 것만 같았던 형광등도 시간이 지나며 별것 아닌 존재가 됐다. 공장과 사무실은 물론 집집이 새하얀 불빛이 원하는 때 언제든 흘러나오게 됐기 때문이다. 하찮은 존재가 돼버린 형광등에 다시 한번 영광의 순간을 선사한 이가 있다. 강렬한 색이 주도하던 1960년대 미술계를 빛으로 전복시킨 미니멀 아트의 선구자 댄 플래빈(1933~1996)이다.

미국 작가 플래빈은 1960년대 후반 대량 생산된 형광등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형광빛의 네온사인이 도시 곳곳을 야비하고 저속한 인공의 공간으로 만들던 때 그는 형광등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만 추출해 3차원으로 옮겨왔다. 텅 비어있는 공간을 비추는 화사한 색들. 백색의 벽을 황금빛 형광등 하나가 사선으로 가르고 수직의 붉은 빛이 공간 모서리를 빛낸다.

회색빛이 지배하는 전시장은 플래빈의 ‘기체 이미지’로 가득했다. 파란색, 녹색,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자외선과 네 가지 흰색 음영의 제한된 색은 빛 하나가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어떻게 좌우하는지 증명한다. 얼핏 보면 지나치게 원초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눈으로 마주했을 때 온전히 다른 감정을 불러온다. 어떤 장면에선 몽환적인 상황으로, 어떤 장면에선 명료한 도형으로 인식된다. 플래빈이 자기 작품을 조각이나 회화로 규정하지 않고 ‘상황의 예술’이라고 고집한 이유다.

미국 뉴욕 태생인 플래빈은 미술 작업과 미술사 공부를 병행한 지적이고 감성적인 예술가였다. 27세가 되던 때 맨해튼 허드슨강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했는데, 이 무렵 그의 노트는 전기 조명을 활용한 작품 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튜브 안에 갇힌 빛들이 뿜어내는 색의 형상은 공간을 비추면서 채우도록 정교하게 설계됐다.
플래빈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1954년 경기 오산 제5공군 부대에서 기상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 한국의 메릴랜드대 교류 프로그램으로 처음 미술을 공부했다.
1956년 뉴욕으로 돌아가 한스호프만미술학교와 뉴스쿨에서 미술사를, 컬럼비아대에서 회화와 드로잉을 공부한 그는 본격적으로 작업 활동에 매진했다. 형광등으로 공간을 뒤엎는 시각적인 유희를 보여준 그는 기존 예술의 금기를 깨뜨리고 산업사회를 정직하게 반영하는 동시에 우아하고 신비로운 빛으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현대미술의 영역을 공간 전체로 확장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따라오는 배경이다.
그에게 형광등은 빛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모서리와 벽면에 형광등을 배치하면서 제목을 ‘무제’로 하거나 그의 친구 이름(재스퍼 존스·솔 르윗·도널드 저드)을 집어넣었다. 때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노골적 반대를 표현한 ‘매복 중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4-나에게 죽음을 상기시켜준 P.K.에게’ 같은 제목도 남겼다. 아름답고 서정적이기만 한 시각적 환희에 상반되는 타이틀을 부여한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빛은 그 자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명확하다. 빛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전달된다.” 전시는 8월 18일까지.
바젤=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