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칼럼] 실시간 뱅크런 시대에 무방비 한국
새마을금고가 지난해 6월 말 갑작스럽게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위기를 맞았다. 지난 60년간 공적자금이 단 한 번도 투입되지 않을 만큼 탄탄한 재정을 자랑했지만,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가 불거지자 순식간에 고객들이 돈을 빼가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말 약 259조원에 달한 예금 잔액이 7월 말 약 242조원으로 한 달 만에 17조원 넘게 줄었다. 정부가 직접 나서 예금 전액 보호를 공언하고,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새마을금고 부실 채권 1조원어치를 매입하면서 가까스로 급한 불을 껐다.

뱅크런 공포를 키운 것은 석 달여 앞서 미국에서 벌어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었다.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40년 역사의 이 은행이 파산하는 데는 불과 36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SVB가 미국 국채 매각으로 인한 대규모 손실을 발표하자 소셜미디어(SNS)가 번개 같은 속도로 공포 심리를 퍼뜨렸고, 예금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자금 인출에 나섰다. 단 하루 만에 인출된 금액이 무려 60조원에 달했다. 공포 심리가 일순간 퍼지면 대형 은행도 손쓸 틈 없이 파산하는 최초의 ‘실시간 뱅크런’ 사례였다.

이처럼 모바일 폰뱅킹과 SNS 사용의 일상화는 은행이 파산에 이르는 속도를 경이적으로 증가시켰다. 세계 최고 수준의 모바일뱅킹 시스템을 구축한 한국은 역설적으로 위기 시 가장 빠른 속도의 뱅크런으로 이어질 수 있다. “SVB 사태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벌어진다면 예금 인출 속도가 미국보다 100배는 빠를 것”이라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지적은 기우가 아니다. 사후 대응이 거의 불가능한 새로운 유형의 위기인 만큼 사전 예방 체계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부실 발생 이후 사후적 안정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춘 탓에 순식간에 벌어지는 모바일 뱅크런 사태에 속수무책인 우리나라의 위기 대응 제도에 경고음이 켜졌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대비돼 있을까. 놀랍게도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정부가 금융회사 부실 예방을 위해 선제적으로 유동성 공급과 자본 확충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긴 했다. 예금보험기금채권과 보증료 수입 등을 재원으로 금융안정계정을 설치해 금융사에 대한 사전적·예방적 지원 체계를 상설화하는 게 골자다. 단기 금리가 급등하는 등 시장 기능이 정상 작동하지 않아 금융사가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는 경우 정부 재정에 의존하지 않고 금융권 스스로 마련한 재원으로 자금을 지원해 부실을 예방하고 위기 전염을 차단하자는 취지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등은 이미 비슷한 사전적 지원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예금자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됐지만, 정쟁에 매몰된 국회의원들의 무관심 속에 표류하다가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 처분됐다.

금융시장 신뢰를 높이기 위해 23년째 5000만원으로 묶여 있는 예금자보호 한도 상향을 추진하는 내용의 예금자보호법 개정안도 지난해에만 10여 개 발의됐고, 올해 들어 총선을 앞두고 여당은 물론 야당도 보호 한도를 1억원으로 올리는 공약을 발표했지만, 이 역시 감감무소식이다.

요즘도 ‘부동산 PF 부실 심화’ ‘저축은행 무더기 적자’ 기사가 연일 튀어나올 정도로 불씨는 여전하다. 모바일 뱅킹 시대에 뱅크런은 예고 없이 찾아와 전염 효과를 통해 순식간에 금융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킨다. 터진 후에 대응하려면 이미 늦다. 그런데도 지금껏 제도적 대비나 지원은 전무한 실정이다. 위기로부터 배우지 못한 대한민국 국회의 직무 유기는 이뿐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