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원을 그려보는 거야, 여름의 초록 공기를 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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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
여름 공기를 가르며, 앙 레르(en l'air)
여름 공기를 가르며, 앙 레르(en l'air)
계절은 온도계의 숫자보다 코끝에 닿는 공기로 먼저 느끼게 된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때 따뜻한 기운이 바람에 실려 오듯이, 여름이 시작되는 지금, 새들과 벌레들의 노래가 공기를 타고 창가로 날아온다. 발레는 ‘공기’와 관련이 깊다. 공기의 정령이 등장하는 <라 실피드(1832)>에서는 최초의 포인트슈즈(토슈즈)가 등장하기도 했다.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살랑살랑 가벼운 움직임과 춤의 호흡이야말로 발레의 매력이다.
발레는 하늘로 향하는 춤이기 때문에 공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는 동작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렇게 발과 다리 혹은 몸통이 공기 중에 떠 있는 동작들을 통틀어 ‘앙 레르(en l'air)’라고 부른다. 공기(air)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공기 중에, 공중에’라는 뜻을 갖고 있는 용어이다.
앙 레르의 대표적인 동작은 ‘롱 드 장브 앙 레르(rond de jambe en l'air)’이다. 한쪽 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다른 쪽 다리를 서 있는 다리와 직각이 되게 든 채 무릎을 폈다 구부렸다 하며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동작이다. '롱드(rond)'는 라운드(round), 즉 원을 그린다는 뜻이고, ‘장브(jambe)’는 다리라는 뜻이다. 뜻 그대로 ‘공중에서 원을 그리는’ 동작인 것. 이 동작에서는 들고 있는 다리가 앙 레르 상태이다.
하지만 이 동작에서 정작 중요한 지점은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움직임이 아니라 동작을 수행할 때 허리와 골반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가운데 중심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다리를 들어도 허리선과 골반 높이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발레의 여러 동작들은 높이 뛰고, 높이 들고, 몸을 일상의 범주보다 확장해서 사용하지만 몸이 찌그러지거나 기울어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골반을 기준으로 X축과 Y축을 그려놓고 그 축이 어떤 동작을 하든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높이 들고 많이 뛰는 것보다 어렵고 중요한 건 이 부분이다. 롱 드 장브 앙 레르를 연습하는 것도 이런 점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 중 하나이다.
이 동작은 남녀 무용수 모두가 선보이지만 남성 무용수만 하는 특별한 앙 레르 동작도 있다. ‘투르 앙 레르(tour en l'air)’이다. 앙 레르에 회전한다는 뜻의 ‘투르(tour)’가 붙은 만큼 공중으로 솟아올라 회전하는 동작을 가리킨다.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적게는 한 번, 많게는 3회전까지 하고 내려오는데 시각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화려하고 역동적이기 때문에 남성 무용수의 동작 중 백미로 꼽힌다. 그래서 발레의 어떤 작품이든 이 동작은 꼭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똑같이 투르 앙 레르를 하더라도 작품 안에서 장면에 따라 이 동작이 갖는 의미나 느낌은 다르다. 예를 들어 <파리의 불꽃(1932)> 4막에서 남녀 주인공의 그랑 파드되에 등장하는 투르 앙 레르는 기쁨, 환호, 희망을 가득 품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혁명이 시민들의 승리로 끝난 후 의용군 필리프가 연인 잔느와 부부가 되면서 춤을 출 때 투르 앙 레르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일, 모두를 거머쥔 필리프에게는 이제 새로운 시작,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고, 당연히 그의 투르 앙 레르에는 환희가 가득할 수밖에 없다. 그 장면을 보는 관객도 밝고 힘찬 에너지를 선사 받는다. 그런데 <탈리스만 파드되(1955)>에 나오는 투르 앙 레르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 실린다. 이 작품은 인간들이 바람의 신이 가지고 있는 부채 ‘탈리스만’을 훔치려고 물의 요정 님프에게 바람의 신을 유혹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결국 바람의 신이 님프에게 홀려 부채를 도둑맞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남성 무용수는 바람의 신인만큼 말 그대로 바람과 공기를 가르는 듯한 도약과 회전으로 선보이게 된다. 이 작품에서의 투르 앙 레르는 바람과 공기를 가르는 가벼움, 사람이 아닌 신화적 존재가 갖는 신비한 이미지를 자아낸다. 같은 동작이지만 <파리의 불꽃>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참고로 1889년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8~1910)가 리카르도 드리고Riccardo Drigo(1846~1930)의 음악에 맞춰 안무한 <탈리스만>은 4막 7장의 발레 작품으로 <탈리스만 파드되>와는 다른 스토리를 갖고 있다. <탈리스만 파드되>는 표트르 구세프(Piotr Goussev, 1904~1987)가 <탈리스만>과 다른 몇몇 작품들에서 음악을 가져와 새롭게 안무한 작품이다. 현재 프티파의 전막발레는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고, 구세프의 <탈리스만 파드되>는 종종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여름이 시작됐다. 자연을 벗 삼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했던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그의 시 <계절에 따라가며 살아가리라>에서 “여름과 함께 초록불로 타오르고”라는 표현을 썼다. 이 시구 사이로 투르 앙 레르의 동작이 떠오른다. 여름의 낮과 밤에는 초록의 공기가 가득하다. 무용수라면 투르 앙 레르를 하며 그 공기를 느끼겠지만, 그 대신 두 다리와 발로 공기 사이를 가르며, 소로가 쓴 시처럼 계절 속으로 한껏 걸어 들어가 본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앙 레르의 대표적인 동작은 ‘롱 드 장브 앙 레르(rond de jambe en l'air)’이다. 한쪽 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다른 쪽 다리를 서 있는 다리와 직각이 되게 든 채 무릎을 폈다 구부렸다 하며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동작이다. '롱드(rond)'는 라운드(round), 즉 원을 그린다는 뜻이고, ‘장브(jambe)’는 다리라는 뜻이다. 뜻 그대로 ‘공중에서 원을 그리는’ 동작인 것. 이 동작에서는 들고 있는 다리가 앙 레르 상태이다.
하지만 이 동작에서 정작 중요한 지점은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움직임이 아니라 동작을 수행할 때 허리와 골반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가운데 중심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다리를 들어도 허리선과 골반 높이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발레의 여러 동작들은 높이 뛰고, 높이 들고, 몸을 일상의 범주보다 확장해서 사용하지만 몸이 찌그러지거나 기울어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골반을 기준으로 X축과 Y축을 그려놓고 그 축이 어떤 동작을 하든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높이 들고 많이 뛰는 것보다 어렵고 중요한 건 이 부분이다. 롱 드 장브 앙 레르를 연습하는 것도 이런 점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 중 하나이다.
이 동작은 남녀 무용수 모두가 선보이지만 남성 무용수만 하는 특별한 앙 레르 동작도 있다. ‘투르 앙 레르(tour en l'air)’이다. 앙 레르에 회전한다는 뜻의 ‘투르(tour)’가 붙은 만큼 공중으로 솟아올라 회전하는 동작을 가리킨다.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적게는 한 번, 많게는 3회전까지 하고 내려오는데 시각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화려하고 역동적이기 때문에 남성 무용수의 동작 중 백미로 꼽힌다. 그래서 발레의 어떤 작품이든 이 동작은 꼭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똑같이 투르 앙 레르를 하더라도 작품 안에서 장면에 따라 이 동작이 갖는 의미나 느낌은 다르다. 예를 들어 <파리의 불꽃(1932)> 4막에서 남녀 주인공의 그랑 파드되에 등장하는 투르 앙 레르는 기쁨, 환호, 희망을 가득 품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혁명이 시민들의 승리로 끝난 후 의용군 필리프가 연인 잔느와 부부가 되면서 춤을 출 때 투르 앙 레르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일, 모두를 거머쥔 필리프에게는 이제 새로운 시작,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고, 당연히 그의 투르 앙 레르에는 환희가 가득할 수밖에 없다. 그 장면을 보는 관객도 밝고 힘찬 에너지를 선사 받는다. 그런데 <탈리스만 파드되(1955)>에 나오는 투르 앙 레르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 실린다. 이 작품은 인간들이 바람의 신이 가지고 있는 부채 ‘탈리스만’을 훔치려고 물의 요정 님프에게 바람의 신을 유혹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결국 바람의 신이 님프에게 홀려 부채를 도둑맞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남성 무용수는 바람의 신인만큼 말 그대로 바람과 공기를 가르는 듯한 도약과 회전으로 선보이게 된다. 이 작품에서의 투르 앙 레르는 바람과 공기를 가르는 가벼움, 사람이 아닌 신화적 존재가 갖는 신비한 이미지를 자아낸다. 같은 동작이지만 <파리의 불꽃>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참고로 1889년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8~1910)가 리카르도 드리고Riccardo Drigo(1846~1930)의 음악에 맞춰 안무한 <탈리스만>은 4막 7장의 발레 작품으로 <탈리스만 파드되>와는 다른 스토리를 갖고 있다. <탈리스만 파드되>는 표트르 구세프(Piotr Goussev, 1904~1987)가 <탈리스만>과 다른 몇몇 작품들에서 음악을 가져와 새롭게 안무한 작품이다. 현재 프티파의 전막발레는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고, 구세프의 <탈리스만 파드되>는 종종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여름이 시작됐다. 자연을 벗 삼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했던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그의 시 <계절에 따라가며 살아가리라>에서 “여름과 함께 초록불로 타오르고”라는 표현을 썼다. 이 시구 사이로 투르 앙 레르의 동작이 떠오른다. 여름의 낮과 밤에는 초록의 공기가 가득하다. 무용수라면 투르 앙 레르를 하며 그 공기를 느끼겠지만, 그 대신 두 다리와 발로 공기 사이를 가르며, 소로가 쓴 시처럼 계절 속으로 한껏 걸어 들어가 본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